朴正熙는 大韓民國의 第5-9代大統領이다.
그의 時代부터 約 30年間에 걸쳐 大韓民國은 “漢江의 奇跡”으로 불리는 高度 經濟成長을 이루며 世界最貧國의 階層에서 大韓民國을 끌어낸 功勞를 評價받았다. 1979年에 側近 金載圭에게 暗殺當했다.
號는 中樹. 日政時代에 그가 使用한 日本式 이름은 創氏改名 運動 때 命名된 高木正雄(다까기 마사오)였다.
英文表記는 一般的으로 Park Chung-hee이다.
略歷[編輯]
朴正熙 大統領의 家門은 沒落한 兩班이다. 本貫은 高靈朴氏이다. 日本이 韓國을 强占한 後 韓半島에서 한 집안의 막내로 태어났다. 大邱師範學校[3]를 卒業하고 暫時 敎鞭을 잡았다. 以後 滿洲國軍 軍官을 志望하며 1939年4月 滿洲國陸軍軍官學校 豫科에 入學해 1944年4月 滿洲國陸軍軍官學校 本科를 卒業했다. 日本陸軍士官學校留學生課程에 短期派遣을 거쳐 1944年9月 滿洲國軍少尉로 任官했다. 中共八路軍과 對日戰에 參戰한 蘇聯軍과의 戰鬪에 參加하여 滿洲國南部熱河省[4]에서 終戰을 맞이했다.
第二次世界大戰後中國北平[5]에 設置된 大韓民國臨時政府에 參與했고, 韓半島南北分斷當時南側의 大韓民國을 支持하여 朝鮮警備隊大尉가 되었다. 朝鮮警備隊가 大韓民國國軍으로 再編된 後에도 繼續服務하다가 한때 南朝鮮勞動黨員이었던 것이 發覺되어 軍法會議에 回附되었으나 轉向하여 南勞黨黨內情報를 提供한 것과 그 能力을 높이 評價한 軍 將校의 救命歎願으로 軍籍을 剝奪當하지 않고 以後文官으로 勤務를 繼續하다가 6·25戰爭勃發로 軍籍을 回復한다.
6·25戰爭이 끝날 무렵에는 陸軍大領까지 進級했고, 1959年에는 陸軍少將, 第6軍管區司令官이라는 重責을 맡았다. 한便, 內戰을 마친 韓國內에서는 李承晩의 大規模不正選擧로 인해 四月革命이 勃發하여 第二共和國體制가 成立되었으나, 議會의 混亂으로 復興과 産業化等이 全혀 進陟되지 않았고, 軍內部의 不正腐敗도 深刻해지고 있었다. 이러한 狀況에 對해 1961年5月 軍將軍, 將校, 士官等改革派를 中心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軍事政權(國家再建最高會議)을 樹立했다(5.16 軍事政變). 形式的인 民政移讓이 이루어진 以後에도 實權을 掌握하고 自身의 政黨인 民主共和黨에 依한 事實上의 獨裁體制를 形成하여 第5代부터 第9代 大韓民國 大統領(1963年~1979年 在任)과 大統領 任期를 5期에 걸쳐 歷任하며 權威主義體制에 依한 開發獨裁를 推進했다.
獨裁政權 時節에는 日本의 佐藤榮作 內閣總理大臣과 韓日基本條約을 批准하여 韓日兩國의 國交를 正常化했고, 美國의 린든 존슨 大統領의 要請에 따라 1964年 越南戰爭에 韓國軍을 派兵했다. 美日兩國의 經濟的 支援을 받아 "漢江의 奇跡"이라 불리는 高度經濟成長을 이룩했다. 大韓民國은 1960年代부터 1970年代 朴正熙政權時節의 高度 經濟成長으로 1970年頃까지 經濟的으로 劣等했던 같은 韓民族의 分斷國家인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北韓)을 經濟的으로 追越하여 最貧國의 隊列에서 벗어났다.
한便 統制的인 軍事政權下에서 民主化等의 運動은 徹底하게 彈壓되었고, 人權에 問題가 되는 拷問과 政治犯投獄等이 恣行되었다. 對外政策에서는 越南戰爭에 介入하는 等一貫되게 親美政策을 取했지만, 美中國交正常化以後에는 獨自的인 核武裝을 推進했다. 그러나 이로 인해 美國과의 關係가 惡化되어 카터 大統領의 强力한 牽制를 받아 失敗했다. 또한 日本과의 友好的態度도 國內民族主義(左派民族主義)로부터 敵對視되는 背景이 되었다. 政權後半에는 獨自的인 核武裝等自主國防路線과 日本에 滯留中이던 民主化運動家金大中을 大韓民國 中央情報部에 依해 拉致하는 等强勁한 政策을 推進했다(金大中拉致事件).
1979年10月16日 大規模民主化示威가 發生했고(釜馬事態), 10月26日祕密晩餐자리에서 示威鎭壓을 命令한 直後側近인 中央情報部長金載圭에 依해 大統領警護室長車智澈과 함께 銃殺當했다. 享年 61歲.
家族[編輯]
- 아버지: 朴成彬
- 어머니: 白南儀
- 前妻: 金好南
- 아내: 陸英修
- 內緣女: 李現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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