豐臣朝臣羽柴藤吉郞秀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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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豐臣秀吉의肖像 (狩野光信 作, 高臺寺 所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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家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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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五七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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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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戰國時代(室町時代後期) ~ 安土桃山時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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出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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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文六年二月六日 (율리우스曆 1537年3月17日) 日本 尾張國愛知郡中村鄕中中村 (現 愛知縣名古屋市中村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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死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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慶長三年八月十八日 (그레고리曆 1598年9月18日) 日本 山城國紀伊郡木幡山伏見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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墓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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豐國神社[1], 不動院[2], 高野山奧之院[3], 國泰寺[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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官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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筑前守, 從五位下·左近衛權少將, 從四位下·參議, 從三位·權大納言, 正二位·內大臣, 從一位·關白, 太政大臣, 贈正一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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主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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松下之綱 → 織田信長 → 織田秀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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特記事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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馬印은 “黃金 瓢주박”(日: 金瓢簞). 一之谷馬藺兜는 豐臣秀吉의 代表的인 투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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豐臣秀吉은 日本 戰國時代와 安土桃山時代에 活躍했던 武將이며, 大名이다. 天下人, (初代) 武家 關白, 太閤이다. 織田信長, 德川家康과 함께 戰國三英傑로 불린다.
略歷 [編輯]
어린 時節에 對해서는 여러 가지 傳說이 있지만 明確하게 밝혀지지 않았으며, 尾張國의 大名 織田信長을 섬기며 젊은 나이에 織田 家門의 有力한 武將이 되었다. 織田信長이 支配 領土를 擴張하는 過程에서 더욱 功을 세워 日本 中部 一部 地域(長濱, 但馬國, 播磨國)을 領有하는 織田 家門의 宿老 中 한 名이 되었다. 毛利氏를 討伐하기 위해 派遣된 中國攻掠 途中 織田信長이 政變으로 明智光秀에게 죽임을 當하자 그는 서둘러 毛利氏와 和解하고 京으로 돌아와 山崎戰鬪에서 明智光秀를 물리쳤다. 또한 織田信長의 孫子 三法師를 가지고 織田 政權 內部의 主導權 다툼에서 勝利하여 織田信長을 代身해 그의 事業을 繼承하고 自身의 政權을 確立했다. 豐臣秀吉은 武士로서는 처음으로 關白이 되었다. 朝廷의 權威를 背景으로 惣無事의 名目으로 各地의 大名에게 臣從을 要求하고, 北條氏를 무너뜨린 小田原 征伐로 天下統一을 이룩했다.
統一 後 豐臣 政權은 太閤檢地, 刀狩令, 石高制 等 全國的인 政策을 推進하여 日本 全國의 藏入地와 鑛山 輸入으로 莫大한 財力을 손에 넣었다. 豐臣 政權은 聚樂第, 京의 大佛, 伏見城 等 大規模 建築物을 造營했으며, 豐臣秀吉은 茶道, 美術 工藝, 藝能을 愛好하여 그 發展을 促進했다. 豐臣 時代에 日本 文化는 蕃盛했다.
理由는 諸說이 있지만 老年에는 明나라 征服을 決意하고 朝鮮에 出兵했다. 이 侵略은 韓半島 사람들에게 깊은 苦痛을 안겨주었다. 그 渦中에 親아들 豐臣秀賴가 태어나자 後繼者로 定했던 조카 豐臣秀次를 排除하고 政權을 再構築해야 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豐臣秀吉은 病에 걸려 어린 豐臣秀賴를 五大老와 五奉行에게 맡기고 世上을 떠났다. 侵略 戰爭의 끝을 보기 前에 世上을 떠버린 탓에 日本軍의 撤軍으로 倭亂은 幕을 내리고, 政權의 支持 基盤을 다지는 것도 失敗해 自身의 死後에 政權이 무너지고 德川家康에게 權力이 넘어가는 端初를 남긴 人物이기도 하다.
最初에는 木下藤吉郞秀吉라고 불렀다. 卽, 그의 苗字는 木下, 通稱은 藤吉郞, 諱는 秀吉이었다.
1573年에는 苗字를 木下에서 羽柴로 바꾸었다. 羽柴의 由來에 對해서는 織田 勢力의 重臣 柴田勝家와 丹羽長秀에서 한 글字씩을 따왔다는 說이 있다. 當時 書狀에는 "羽柴藤吉郞秀吉"라고 署名되어 있다.
秀吉은 氏는 勿論 姓도 없을 程度로 下層階級 出身으로 여겨지지만, 立身榮達하여 家系의 公稱이 必要하게 되자 秀吉은 平氏를 自稱했다. 이는 主君인 織田信長을 模倣한 것으로 여겨진다. 平氏의 姓은 朝臣이었기 때문에 이 時期 秀吉의 全體 이름은 平朝臣羽柴藤吉郞秀吉였다.
1585年7月, 關白에 任命되면서 前 關白 近衞前久의 猶子가 되어 氏를 平에서 藤原로 改稱했다. 이듬해 太政大臣에 就任하면서 새로운 氏 "豐臣"을 創始하고 朝廷으로부터 名目上 이 氏를 授與받았다.
秀吉이 右筆 大村由己에게 執筆하게 한 『任官之事』에서는 「옛 姓을 잇는다는 것은 사슴이나 소의 발자국을 밟는 것과 같다」고 하여 單純한 前例 蹈襲은 拒否한다는 뜻을 밝히고 「나의 天下를 지켜 後代에 남겨주고자 한다. 다만 새롭게 다른 姓을 定하는 것으로 始作할 것이다」라고 하여 秀吉 스스로가 特別하고 傑出한 人物로써 旣存의 源平藤橘로 대표되는 武家의 姓에 이은 또 하나의 새로운 氏를 創始하였다, 는 하나의 宣言이었다. 이렇게 해서 그의 이름은 豐臣朝臣羽柴藤吉郞秀吉로 바뀌었다.
日本은 神道와 佛敎의 影響을 많이 받았다. 그의 死後 神道의 神號는 豐國大明神, 佛敎의 戒名은 國泰祐松院殿靈山俊龍大居士라고 이름을 얻었다.
明治維新에 依해 旣存의 氏와 姓과 苗字, 그리고 諱와 通稱의 區分을 廢止하고, 모든 사람이 氏名을 慣習的으로 使用하게 되었다. 그래서 現代에는 一般的으로 羽柴秀吉 또는 豐臣秀吉로 불린다.
家族[編輯]
- 아버지: 木下彌右衞門
- 어머니: 大政所
- 正室: 高臺院 (淺野長勝의 養女)
- 側室: 淀殿 (淺井長政의 딸)
- 첫째 아들: 豐臣鶴松
- 둘째 아들: 豐臣秀賴
關聯文書[編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