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韓民國 簡化字"의 두 版 사이의 差異

4番째 줄: 4番째 줄:
 故래서 1968年 2月부터 [[大韓民國文敎部]]는 1300余이 되자 '漢文略字試案'이라는 첫 番째 草案이 國語審議會에 제출되었고 그중 542個의 [[常用漢字]]를 단순화하였다. 이것은 '542方案'이라고 불린다.
 故래서 1968年 2月부터 [[大韓民國文敎部]]는 1300余이 되자 '漢文略字試案'이라는 첫 番째 草案이 國語審議會에 제출되었고 그중 542個의 [[常用漢字]]를 단순화하였다. 이것은 '542方案'이라고 불린다.


 그러나 '542方案'은 韓國에서 學者와 知識인 民心에 따라 68年 [[朴正熙]] 軍政이 施行하기 始作한 俗談專用('韓 專用政策')으로 인해 542個의 減少가 198個, 즉 最終 198个 草案으로 縮小되었다('198方案').
 그러나 '542方案'은 韓國에서 學者와 知識인 民心에 따라 68年 [[朴正熙]] 軍政이 施行하기 始作한 俗談專用('韓 專用政策')으로 인해 542個의 減少가 198個, 즉 最終 198个 草案으로 縮小되었다('198方案').
 
===二:[[東亞日報]] 新聞用 略字===
===二:[[東亞日報]] 新聞用 略字===
70年代와 80年代에 접어들면서 漢字 使用頻度가 漸漸 낮아지고 있음에도 不拘하고, 그리고 後期에 [[日本]]에서 온 [[活字]]들이 導入되면서 너무 작은 글씨로 因한 眼球의 疲勞度 때문에 紙媒新聞이 主導하는 民間漢字簡體化運動이 회오리바람처럼 불었다.
70年代와 80年代에 접어들면서 漢字 使用頻度가 漸漸 낮아지고 있음에도 不拘하고, 그리고 後期에 [[日本]]에서 온 [[活字]]들이 導入되면서 너무 작은 글씨로 因한 眼球의 疲勞度 때문에 紙媒新聞이 主導하는 民間漢字簡體化運動이 회오리바람처럼 불었다.

2024年4月17日(水)15時23分 版

()()

韓國(한국)日帝(일제)强占期(강점기)以後(이후) 속담 전용 90年代(연대) 90年代(연대) 以前(이전)에 그 주된 널리 使用(사용)되는 印刷(인쇄)文體(문체)는 아래 그림과 같이 基本的(기본적)思考方式(사고방식)漢字(한자)()漢字(한자)로 쓰고 또한 韓國語(한국어)折半(절반)以上(이상)語彙(어휘)漢字語(한자어)()로 하여 이러한 背景(배경)에서 漢字(한자)()()()가 많은 韓國人(한국인)들의 큰 欲求(욕구)가 되었다.

():文敎部(문교부) 略字(약자) 試案(시안)

()래서 1968() 2()부터 大韓民國(대한민국)文敎部(문교부)는 1300()이 되자 '漢文(한문)略字(약자)試案(시안)'이라는 첫 ()草案(초안)國語審議會(국어심의회)에 제출되었고 그중 542()常用漢字(상용한자)를 단순화하였다. 이것은 '542方案(방안)'이라고 불린다.

그러나 '542方案(방안)'은 韓國(한국)에서 學者(학자)知識(지식)民心(민심)에 따라 68() 朴正熙(박정희) 軍政(군정)施行(시행)하기 始作(시작)俗談(속담)專用(전용)('()()專用(전용)政策(정책)')으로 인해 542()減少(감소)가 198(), 즉 最終(최종) 198() 草案(초안)으로 縮小(축소)되었다('198方案(방안)').

():東亞日報(동아일보) 新聞(신문)() 略字(약자)

70年代(연대)와 80年代(연대)에 접어들면서 漢字(한자) 使用(사용)頻度(빈도)漸漸(점점) 낮아지고 있음에도 不拘(불구)하고, 그리고 後期(후기)日本(일본)에서 온 活字(활자)들이 導入(도입)되면서 너무 작은 글씨로 ()眼球(안구)疲勞度(피로도) 때문에 ()()新聞(신문)主導(주도)하는 民間(민간)漢字(한자)()體化(체화)運動(운동)이 회오리바람처럼 불었다.

그래서 東亞日報(동아일보)는 '542方案(방안)'을 基礎(기초)로 90()略字(약자)實驗的(실험적)으로 使用(사용)했다고 發表(발표)했다.그 () 동아일보는 漸次(점차) 略字(약자)를 198()로 늘렸다. 그러나 反應(반응)이 좋지 않았다.

()()() 一覽(일람)(部分(부분))

():韓日(한일) 統一(통일) ()() ()()

原字(원자) 略字(약자)
() ()
() ()
() ()
() ()(()()()”)
() ()
() ()
() ()
() ()
() ()
() ()
()/() ()(字體(자체) 合倂(합병))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