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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豐臣秀吉'''은 日本 [[戰國時代 (日本)|戰國時代]]에 活躍한 武將으로 後에 大名가 되었다.
'''豐臣秀吉'''은 日本 [[戰國時代 (日本)|戰國時代]]에 活躍한 武將으로 後에 大名가 되었 다. 主君 織田信長의 征伐 事業을 이어받아 日本을 統一하는 데 成功하고, 百餘 年 持續된 四分五裂의 世上을 끝내고 權力의 頂點에 올랐다. 그는 16世紀 後半 日本의 事實上 最高 權力者였 다.


 戰國時代에 가장 出世한 人物로 有名하 다. 微賤한 出身으로 태어나 日本 朝廷 最高의 자리인 關白까지 오른 人物이다. [[織田信長]], [[德川家康]]과 함께 [[戰國三英傑]]로 불린다.
 戰國時代에 가장 出世한 人物로 有名하 며, 微賤한 出身으로 태어나 日本 朝廷 最高의 자리인 關白까지 오른 人物이다.
 
[[織田信長]], [[德川家康]]과 함께 [[戰國三英傑]]로 불린다.


== 略歷 ==
== 略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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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5年]]7月, 關白에 任命되면서 前 關白 近衞前久의 猶子가 되어 氏를 平에서 藤原로 改稱했다. 이듬해 太政大臣에 就任하면서 새로운 氏 "豐臣"을 創始하고 朝廷으로부터 名目上 이 氏를 授與받았다.
[[1585年]]7月, 關白에 任命되면서 前 關白 近衞前久의 猶子가 되어 氏를 平에서 藤原로 改稱했다. 이듬해 太政大臣에 就任하면서 새로운 氏 "豐臣"을 創始하고 朝廷으로부터 名目上 이 氏를 授與받았다.


 秀吉이 右筆 大村由己에게 執筆하게 한 『任官之事』에서는 「옛 [[姓]]을 잇는다는 것은 [[사슴]]이나 [[소]]의 발자국을 밟는 것과 같 다」 고 하여 單純한 前例 蹈襲은 拒否한다는 뜻을 밝히고 「나의 天下를 지켜 後代에 남겨주고자 한다. 다만 새롭게 다른 姓을 定하는 것으로 始作할 것이 다」 라고 하여 秀吉 스스로가 特別하고 傑出한 人物로써 旣存의 源平藤橘로  대표 되는 武家의  에 이은 또 하나의 새로운 氏를 創始하였다, 는 하나의 宣言이었다. 이렇게 해서 그의 이름은 豐臣朝臣羽柴藤吉郞秀吉로 바뀌었다.
 秀吉이 右筆 大村由己에게 執筆하게 한 『任官之事』에서는 「옛 [[姓]]을 잇는다는 것은 [[사슴]]이나 [[소]]의 발자국을 밟는 것과 같 다{{*|{{루비除去|古姓を繼ぐは鹿牛の陳跡を踏むがごとし}}}}」 고 하여 單純한 前例 蹈襲은 拒否한다는 뜻을 밝히고 「나의 天下를 지켜 後代에 남겨주고자 한다. 다만 새롭게 다른 姓을 定하는 것으로 始作할 것이 다{{*|{{루비除去|われ天下を保ち末代に名あり。ただ新たに別姓を定め濫觴たるべし}}}}」 라고 하여 秀吉 스스로가 特別하고 傑出한 人物로써 旣存의 源平藤橘로  代表 되는 武家의  에 이은 또 하나의 새로운 氏를 創始하였다, 는 하나의 宣言이었다. 이렇게 해서 그의 이름은 豐臣朝臣羽柴藤吉郞秀吉로 바뀌었다.


[[日本]]은 [[神道]]와 [[佛敎]]의 影響을 많이 받았다. 그의 死後 神道의 神號는 豐國大明神, 佛敎의 戒名은 國泰祐松院殿靈山俊龍大居士라고 이름을 얻었다.
[[日本]]은 [[神道]]와 [[佛敎]]의 影響을 많이 받았다. 그의 死後 神道의 神號는 豐國大明神, 佛敎의 戒名은 國泰祐松院殿靈山俊龍大居士라고 이름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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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한 每年 4月18日과 8月18日 秀吉의 年忌에는 豐國祭라는 盛大한 祝祭가 열리게 되었다. 特히 1604年의 豐國祭는 "豐國祭禮圖屛風"에 그려지는 等 有名하다.
 또한 每年 4月18日과 8月18日 秀吉의 年忌에는 豐國祭라는 盛大한 祝祭가 열리게 되었다. 特히 1604年의 豐國祭는 "豐國祭禮圖屛風"에 그려지는 等 有名하다.


 그러나 大坂의 陣에서 豐臣 宗家이 滅亡하자 德川家康의 뜻에 따라 德川家康 에 依해 方廣寺의 鎭守神으로 삼기{{*|『駿府記』, 『武德編年集成』}} 後水尾天皇의 勅許를 要求하여 豐國大明神이라는 神號를 剝奪되고 神社 自體도 廢社되었다. 더 以上 神이 아닌 秀吉에게는 國泰祐松院殿靈山俊龍大居士라는 佛敎의 戒名이 주어졌다.
 그러나 大坂의 陣에서 豐臣 宗家이 滅亡하자 德川家康의 뜻에 따라 德川家康 方廣寺의 鎭守神으로 삼기{{*|『駿府記』, 『武德編年集成』}} 後水尾天皇의 勅許를 要求하여 豐國大明神이라는 神號를 剝奪되고 神社 自體도 廢社되었다. 더 以上 神이 아닌 秀吉에게는 國泰祐松院殿靈山俊龍大居士라는 佛敎의 戒名이 주어졌다.


 秀吉의 魂靈은 方廣寺 大佛殿 뒤쪽 南東쪽에 세워진 五輪石塔으로 옮겨졌다. 또한 秀吉의 遺體 自體는 靈屋과 함께 阿彌陀峰 山 꼭대기에 남겨졌다{{*|『雍州府志』}}.
 秀吉의 魂靈은 方廣寺 大佛殿 뒤쪽 南東쪽에 세워진 五輪石塔으로 옮겨졌다. 또한 秀吉의 遺體 自體는 靈屋과 함께 阿彌陀峰 山 꼭대기에 남겨졌다{{*|『雍州府志』}}.

2025年 6月 23日 (月) 11:24 基準 最新版

()()朝臣(조신)()()()()()()()

()()()()肖像(초상)
(()()()() ()高臺(고대)() 所藏(소장))
家紋(가문)

()()()
時代(시대) 戰國時代(전국시대)(()()時代(시대)後期(후기)) ~ 安土(안토)()()時代(시대)
出生(출생) 天文(천문)()()二月(이월)六日(육일) (율리우스() 1537()3()17())
日本(일본) ()()()()()()中村(중촌)()()中村(중촌)
(() ()知縣(지현)()古屋(고옥)()中村(중촌)())
死沒(사몰) ()()三年(삼년)八月(팔월)十八(십팔)() (그레고리() 1598()9()18())
日本(일본) 山城(산성)()()()()()()()()()()
官位(관위) ()()(), ()五位(오위)()·()近衛(근위)()少將(소장), ()()()()·參議(참의), ()三位(삼위)·()()納言(납언), 正二(정이)()·內大臣(내대신), ()一位(일위)·()(), ()()大臣(대신), ()()一位(일위)
主君(주군) ()()()()()()()()()()()()
特記(특기)事項(사항) 馬印(마인)은 “黃金(황금) ()주박”((): 金瓢簞). ()()()馬藺(마린)()()()()()代表的(대표적)인 투구된다.

()()()()日本(일본) 戰國時代(전국시대)活躍(활약)武將(무장)으로 ()大名(대명)가 되었다. 主君(주군) ()()()()征伐(정벌) 事業(사업)을 이어받아 日本(일본)統一(통일)하는 데 成功(성공)하고, ()() () 持續(지속)四分五裂(사분오열)世上(세상)을 끝내고 權力(권력)頂點(정점)에 올랐다. 그는 16世紀(세기) 後半(후반) 日本(일본)事實上(사실상) 最高(최고) 權力者(권력자)였다.

戰國時代(전국시대)에 가장 出世(출세)人物(인물)有名(유명)하며, 微賤(미천)出身(출신)으로 태어나 日本(일본) 朝廷(조정) 最高(최고)의 자리인 ()()까지 오른 人物(인물)이다.

()()()(), 德川家康(덕천가강)과 함께 戰國(전국)()英傑(영걸)로 불린다.

略歷(약력) [編輯]

어린 時節(시절)()해서는 여러 가지 傳說(전설)이 있지만 明確(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으며, 一般的(일반적)으로 ()() 地方(지방)의 가난한 農家(농가) 出身(출신)으로 여겨지고 있다. ()()()大名(대명) ()()()()()()[1]으로 섬기며 젊은 나이에 ()() 家門(가문)有力(유력)武將(무장)이 되었다. ()()()()支配(지배) 領土(영토)擴張(확장)하는 過程(과정)에서 더욱 ()을 세워 日本(일본) 中部(중부) 一部(일부) 地域(지역)(()(), ()()(), ()()())을 領有(영유)하는 ()() 家門(가문)宿老(숙로) ()()이 되었다. ()()()討伐(토벌)하기 위해 派遣(파견)中國(중국)攻掠(공략) 途中(도중) ()()()()政變(정변)으로 明智(명지)()()에게 죽임을 ()하자 그는 서둘러 ()()()和解(화해)하고 ()으로 돌아와 ()()戰鬪(전투)에서 明智(명지)()()를 물리쳤다. 또한 ()()()()孫子(손자) ()法師(법사)를 가지고 ()() 政權(정권) 內部(내부)主導權(주도권) 다툼에서 勝利(승리)하여 ()()()()代身(대신)해 그의 事業(사업)繼承(계승)하고 自身(자신)政權(정권)確立(확립)했다. ()()()()武士(무사)로서는 처음으로 ()()이 되었다. 朝廷(조정)權威(권위)背景(배경)으로 ()無事(무사)名目(명목)으로 各地(각지)大名(대명)에게 臣從(신종)要求(요구)하고, ()()()를 무너뜨린 ()田原(전원) 征伐(정벌)天下(천하)統一(통일)을 이룩했다.

統一(통일) () ()() 政權(정권)()()檢地(검지), ()()(), ()()() () 全國的(전국적)政策(정책)推進(추진)하여 日本(일본) 全國(전국)()()()鑛山(광산) 輸入(수입)으로 莫大(막대)財力(재력)을 손에 넣었다. 宗敎的(종교적)()에서는 佛敎(불교) 僧院(승원)保護(보호)하고 가톨릭의 宣敎(선교)流布(유포)抑制(억제)했으며, 西班牙(서반아)() 宣敎師(선교사)들을 迫害(박해)했다. 後日(후일) ()()鎖國(쇄국)嚆矢(효시)가 되었다. ()() 政權(정권)()()(), ()大佛(대불), ()()() () 大規模(대규모) 建築物(건축물)造營(조영)했으며, ()()()()茶道(차도), 美術(미술) 工藝(공예), 藝能(예능)愛好(애호)하여 그 發展(발전)促進(촉진)했다. ()() 時代(시대)日本(일본) 文化(문화)蕃盛(번성)했다.

理由(이유)諸說(제설)이 있지만 老年(노년)에는 ()나라 征服(정복)決意(결의)하고 朝鮮(조선)出兵(출병)했다. 이 侵略(침략)韓半島(한반도) 사람들에게 깊은 苦痛(고통)을 안겨주었다. 그 渦中(와중)()아들 ()()()()가 태어나자 後繼者(후계자)()했던 조카 ()()()()排除(배제)하고 政權(정권)再構築(재구축)해야 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에 걸려 어린 ()()()()五大(오대)()()奉行(봉행)에게 맡기고 世上(세상)을 떠났다. 侵略(침략) 戰爭(전쟁)의 끝을 보기 ()世上(세상)을 떠버린 탓에 日本(일본)()撤軍(철군)으로 倭亂(왜란)()을 내리고, 政權(정권)支持(지지) 基盤(기반)을 다지는 것도 失敗(실패)自身(자신)死後(사후)政權(정권)이 무너지고 德川家康(덕천가강)에게 權力(권력)이 넘어가는 端初(단초)를 남긴 人物(인물)이기도 하다.

이름[編輯]

最初(최초)에는 ()()()()()()()라고 불렀다. (), 그의 ()()()(), 通稱(통칭)()()(), ()()()이었다.

1573()에는 ()()()()에서 ()()로 바꾸었다. ()()由來(유래)()해서는 ()() 勢力(세력)重臣(중신) ()()()()()()()()에서 한 글()씩을 따왔다는 ()이 있다. 當時(당시) 書狀(서장)에는 "()()()()()()()"라고 署名(서명)되어 있다.

()()()勿論(물론) ()도 없을 程度(정도)下層階級(하층계급) 出身(출신)으로 여겨지지만, 立身(입신)榮達(영달)하여 家系(가계)公稱(공칭)必要(필요)하게 되자 ()()()()自稱(자칭)했다. 이는 主君(주군)()()()()模倣(모방)한 것으로 여겨진다. ()()()朝臣(조신)이었기 때문에 이 時期(시기) ()()全體(전체) 이름은 ()朝臣(조신)()()()()()()()였다.

1585()7(), ()()任命(임명)되면서 () ()() ()()()()猶子(유자)가 되어 ()()에서 ()()改稱(개칭)했다. 이듬해 ()()大臣(대신)就任(취임)하면서 새로운 () "()()"을 創始(창시)하고 朝廷(조정)으로부터 名目(명목)()()授與(수여)받았다.

()()()() 大村(대촌)()()에게 執筆(집필)하게 한 『任官(임관)()()』에서는 「옛 ()을 잇는다는 것은 사슴이나 의 발자국을 밟는 것과 같다[2]」고 하여 單純(단순)前例(전례) 蹈襲(도습)拒否(거부)한다는 뜻을 밝히고 「나의 天下(천하)를 지켜 後代(후대)에 남겨주고자 한다. 다만 새롭게 다른 ()()하는 것으로 始作(시작)할 것이다[3]」라고 하여 ()() 스스로가 特別(특별)하고 傑出(걸출)人物(인물)로써 旣存(기존)()()()()代表(대표)되는 武家(무가)()에 이은 또 하나의 새로운 ()創始(창시)하였다, 는 하나의 宣言(선언)이었다. 이렇게 해서 그의 이름은 ()()朝臣(조신)()()()()()()()로 바뀌었다.

日本(일본)神道(신도)佛敎(불교)影響(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의 死後(사후) 神道(신도)()()()()大明(대명)(), 佛敎(불교)戒名(계명)國泰(국태)()()()殿()靈山(영산)()()()居士(거사)라고 이름을 얻었다.

明治維新(명치유신)()旣存(기존)()()()(), 그리고 ()通稱(통칭)區分(구분)廢止(폐지)하고, 모든 사람이 氏名(씨명)慣習的(관습적)으로 使用(사용)하게 되었다. 그래서 現代(현대)에는 一般的(일반적)으로 ()()()() 또는 ()()()()로 불린다.

身後(신후)記念(기념)[編輯]

1598()9()18()死亡(사망)()()()()遺體(유체)火葬(화장)하지 않고 ()()() 안에 安置(안치)되어 있었으나, 死亡(사망) 이듬해인 1599()4()13(), 遺命(유명)에 따라 ()()()(()大佛(대불)이 있는 곳)의 ()阿彌陀(아미타)() 頂上(정상)에 묻히고 그 ()기슭에 ()野山(야산)僧侶(승려) 木食(목식)()()()()()이 세워진 것이 그 始作(시작)이다. ()()는 "大佛(대불)鎭守(진수)()"라고 불렀다.

4()16(), 朝廷(조정)에서 ()()大明(대명)()()()附與(부여)받았다.[4]()()大明(대명)()臨時(임시)祭禮(제례)()日記(일기)』에 따르면 日本(일본)의 옛 이름인 "()()()()()()"에서 따온 것이지만, ()()()意識(의식)한 것이었다. ()() 下賜(하사) ()()에는 ()()大明(대명)()兵威(병위)異域萬里(이역만리)까지 휘두르는 武神(무신)으로 說明(설명)되어 있다. 4()18()에는 ()()魂靈(혼령)()()으로 옮기는 儀式(의식)[5]擧行(거행)되었고, ()()()()神社(신사)命名(명명)되었다. 4()19()에는 ()一位(일위) ()()가 주어졌다[6]. 日本(일본)에서는 드물게 平安(평안)하게 죽은 當代(당대)權力者(권력자)神格化(신격화)하여 神社(신사)()으로서 奉安(봉안)되었다.

普通(보통) 神社(신사)에서 神格化(신격화)人間(인간), () 人神(인신)을 받들 때는, 該當(해당) 사람이 怨恨(원한)을 품고 죽어 世上(세상)()를 끼친다고 判斷(판단)할 때, 그 ()()을 달래고자 지었다. 그러므로 平安(평안)하게 죽은 當代(당대)權力者(권력자)()으로 모시는 것은 神道(신도)論理(논리)로 볼 때 무척 異常(이상)한 일이다. 그러나 살아서는 權力者(권력자)로 온갖 富貴榮華(부귀영화)를 누리고 죽어서는 ()으로 받들린다니 그것 참 魅力的(매력적)인 일이기도 하고, 銅像(동상)을 세우는 것과 마찬가지로 自身(자신)()記憶(기억)을, 그리고 그 後裔(후예)들을 團結(단결)시키는 象徵(상징)이 되는 () 虛榮心(허영심)實益(실익)을 겸한 效果(효과)가 매우 컸다. ()()()()은 그러한 象徵(상징)을 노려 自己(자기)가 죽은 뒤 神社(신사)를 세우도록 미리 遺言(유언)을 남겼다.

또한 每年(매년) 4()18()과 8()18() ()()年忌(연기)에는 ()()()라는 盛大(성대)祝祭(축제)가 열리게 되었다. ()히 1604()()()()는 "()()祭禮(제례)()屛風(병풍)"에 그려지는 () 有名(유명)하다.

그러나 ()()()에서 ()() 宗家(종가)滅亡(멸망)하자 德川家康(덕천가강)의 뜻에 따라 德川家康(덕천가강)()()()鎭守(진수)()으로 삼기[7] 後水(후수)()天皇(천황)勅許(칙허)要求(요구)하여 ()()大明(대명)()이라는 ()()剝奪(박탈)되고 神社(신사) 自體(자체)()()되었다. 더 以上(이상) ()이 아닌 ()()에게는 國泰(국태)()()()殿()靈山(영산)()()()居士(거사)라는 佛敎(불교)戒名(계명)이 주어졌다.

()()魂靈(혼령)()()() 大佛殿(대불전) 뒤쪽 南東(남동)쪽에 세워진 五輪(오륜)石塔(석탑)으로 옮겨졌다. 또한 ()()遺體(유체) 自體(자체)()()과 함께 阿彌陀(아미타)() () 꼭대기에 남겨졌다[8].

()()의 아내 ()()()懇曲(간곡)付託(부탁)으로 神社(신사) ()殿()은 남겨졌지만, 以後(이후) 一切(일체)修理(수리)禁止(금지)되어 썩어가는 狀態(상태)放置(방치)되었다. 1640()에는 ()()神社(신사)의 옛 參拜(참배)()()日吉(일길)神社(신사)再建(재건)되면서 山頂(산정)으로 가는 通路(통로) 및 옛 ()殿()參拜(참배)할 수 있는 通路(통로)消滅(소멸)했다. 이에 ()해 "幕府(막부)意向(의향)에 따라 ()()神社(신사) 參拜(참배)()를 막았다"는 見解(견해)가 있는 反面(반면), "()日吉(일길)神社(신사) 안에 ()() 墓所(묘소) ()() 建設(건설)實質的(실질적)()()神社(신사)再興(재흥)"이라고 보는 視角(시각)도 있다.

幕府(막부)가 무너진 () 1868() 4() 明治(명치)天皇(천황)大阪(대판)行次(행차)했을 때, ()()을 "皇威(황위)海外(해외)宣揚(선양)하고 數百(수백)()이 지나도 感歎(감탄)하게 하는, 國家(국가)에 큰 勳功(훈공)이 있는 古今(고금)超越(초월)人物(인물)"이라고 賞讚(상찬)하며 ()()神社(신사)再興(재흥)布告(포고)하는 文書(문서)下達(하달)되었다. 1875() 京都(경도) 東山(동산)()()殿()建立(건립)되고 ()()任命(임명)되었다. 1880() ()()() 大佛殿(대불전) 옆에 세워진 새로운 ()殿()으로 옮겨졌다.

()()가 죽은 () 側近(측근)이었던 臨濟宗(임제종) 僧侶(승려) ()()()()遺髮(유발)不動(부동)()安國寺(안국사)로 가져가 遺髮(유발) 무덤을 세웠다.

家族(가족)[編輯]

  • 아버지: ()()()()()()
  • 어머니: 大政(대정)()
  • 正室(정실): 高臺(고대)() (()()()()養女(양녀))
    • 養子(양자): ()()()()
  • 側室(측실): ()殿() (()()()()의 딸)
    • 첫째 아들: ()()()()
    • 둘째 아들: ()()()()

關聯(관련)文書(문서)[編輯]

  1. 兵卒(병졸)이 되는 最下級(최하급)武士(무사)
  2. 古姓を繼ぐは鹿牛の陳跡を踏むがごとし
  3. われ天下を保ち末代に名あり。ただ新たに別姓を定め濫觴たるべし
  4. ()小路(소로)文書(문서)』「()()
  5. 遷宮の儀
  6. ()()()()日記(일기)
  7. 駿()()()』, 『武德(무덕)編年(편년)集成(집성)
  8. 雍州(옹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