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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武士情報 | | {{武士情報 |
| | 氏名 = 豐臣秀吉 | | | 氏名 = 豐臣 朝臣羽柴藤吉郞 秀吉 |
| | 그림 = Toyotomi hideyoshi.jpg | | | 그림 = Toyotomi hideyoshi.jpg |
| | 그림說明 = 豐臣秀吉의肖像<br>(狩野光信 作, [[高臺寺 (京都市)|高臺寺]] 所藏) | | | 그림說明 = 豐臣秀吉의肖像<br>(狩野光信 作, [[高臺寺 (京都市)|高臺寺]] 所藏)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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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死沒 = [[慶長]]三年八月十八日 ([[그레고리曆]] [[1598年]][[9月18日]]) | | | 死沒 = [[慶長]]三年八月十八日 ([[그레고리曆]] [[1598年]][[9月18日]]) |
| | 死沒地 = [[日本]] [[山城國]][[紀伊郡]][[木幡山]]伏見城 | | | 死沒地 = [[日本]] [[山城國]][[紀伊郡]][[木幡山]]伏見城 |
| | 兒名 = <small>(不明)</sm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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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改名 = 木下藤吉郞 → 木下秀吉 → 羽柴秀吉 → 藤原秀吉 → 豐臣秀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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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別名 = 別名: 元吉<br/>渾名: 木綿藤吉, 豐太閤, 猿, 대머리 쥐({{루비除去|禿げ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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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神號 = 豐國大明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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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戒名 = 國泰祐松院殿靈山俊龍大居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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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墓所 = [[豐國神社 (京都市)|豐國神社]]{{*|[[京都市]][[東山區]]}}, [[不動院 (廣島市)|不動院]]{{*|[[廣島市]][[東區 (廣島市)|東區]]}}, [[高野山]]奧之院{{*|[[和歌山縣]][[高野町]]}}, [[國泰寺 (廣島市)|國泰寺]]{{*|廣島市[[西區 (廣島市)|西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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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官位 = [[筑前國|筑前守]], [[從五位|從五位下]]·[[近衛府|左近衛權少將]], [[從四位|從四位下]]·[[參議]], [[從三位]]·[[大納言|權大納言]], [[正二位]]·[[內大臣]], [[從一位]]·[[關白]], [[太政大臣]], 贈[[正一位]] | | | 官位 = [[筑前國|筑前守]], [[從五位|從五位下]]·[[近衛府|左近衛權少將]], [[從四位|從四位下]]·[[參議]], [[從三位]]·[[大納言|權大納言]], [[正二位]]·[[內大臣]], [[從一位]]·[[關白]], [[太政大臣]], 贈[[正一位]] |
| | 主君 = [[松下之綱]] → [[織田信長]] → [[織田秀信]] | | | 主君 = [[松下之綱]] → [[織田信長]] → [[織田秀信]] |
| | 氏族 = [[木下氏]](<sup>[諸說있음]</sup>[[平氏|平姓]] 或은 [[宇多源氏]][[佐佐木氏|佐佐木流]])→ [[羽柴氏]](平姓 → [[藤原氏|藤原姓]]([[猶子]])→ [[豐臣氏|豐臣姓]](賜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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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父母 = 아버지: [[木下彌右衞門]]<br/>어머니: [[大政所]](天瑞院春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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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兄弟 = 누나: [[日秀尼|日秀]]{{*|[[三好吉房]]의 아내}}<br/>同生: [[豐臣秀長|秀長]], [[朝日姬]]{{*|[[佐治日向守]]의 아내 → [[副田吉成]]의 아내 → [[德川家康]]의 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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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내 = [[正室]]: '''[[高臺院]]'''([[淺野長勝]]의 養女)<br/>[[側室]]: [[淀殿]]([[淺井長政]]의 딸)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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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子女 = [[羽柴秀勝 (石松丸)|石松丸]], [[豐臣鶴松|鶴松]], '''[[豐臣秀賴|秀賴]]'''<br/>養子: '''''[[豐臣秀次|秀次]]''''', ''[[結城秀康|秀康]]'', ''[[小早川秀秋|秀俊]]'', ''[[豐臣秀勝|秀勝]]'', ''[[豪姬]]'', ''[[前田菊姬|菊姬]]'', ''[[竹林院 (眞田信繁 正室)|竹林院]]'', ''[[崇源院|江]]'', ''[[小姬]]'', ''[[絲姬]]'' 외<br/>猶子: ''[[八條宮智仁親王]]'', ''[[近衛前子]]''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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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特記事項 = 馬印은 “黃金 瓢주박”(日: {{루비除去|金瓢簞}}). 一之谷馬藺兜는 豐臣秀吉의 代表的인 투구된다. | | | 特記事項 = 馬印은 “黃金 瓢주박”(日: {{루비除去|金瓢簞}}). 一之谷馬藺兜는 豐臣秀吉의 代表的인 투구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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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槪要 ==
| | '''豐臣秀吉'''은 日本 [[戰國時代 (日本)|戰國時代]] 에 活躍한 武將으로 後에 大名가 되었다. 主君 織田信長의 征伐 事業을 이어받아 日本을 統一하는 데 成功하고, 百餘 年 持續된 四分五裂의 世上을 끝내고 權力의 頂點에 올랐다. 그는 16世紀 後半 日本의 事實上 最高 權力者였다. |
| '''豐臣秀吉'''{{*|日語讀音: とよとみ ひでよし}} 또는 '''羽柴秀吉'''{{*|日語讀音: はしば ひでよし}} 은 日本 [[戰國時代 (日本)|戰國時代]] 와 [[ 安土桃山 時 代]]에 活躍했던 [[武將]]이 며, [[ 大 名]]이다. [[天下人]], (初 代) 武 家 [[ 關白]], [[ 太閤]] 입니 다. [[織田信長]], [[ 德川 家 康]]와 함께 [[ 戰國三英傑]]로 불린다. | | |
| | 戰國時代에 가장 出世한 人物로 有名하며, 微賤한 出身으로 태어나 日本 朝廷 最高의 자리인 關白까지 오른 人物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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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織田信長]], [[德川家康]]과 함께 [[ 戰國三英傑]]로 불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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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略歷 == |
| | 어린 時 節에 對해서는 여러 가지 傳說이 있지만 明確하게 밝혀지지 않았으며, 一般的으로 尾張 地方의 가난한 農家 出身으로 여겨지고 있다. [[尾張國]]의 大名 [[織田信長]] 을 足輕{{*|兵卒이 되는 最下級의 武士}}으로 섬기며 젊은 나이 에 [[ 織田]] 家門의 有力한 武將 이 되었다. [[織田信長]]이 支配 領土를 擴張하는 過程에서 더욱 功을 세워 日本 中部 一部 地域([[長濱]], [[但馬國]], [[ 播磨國]])을 領有하는 織田 家門의 宿老 中 한 名 이 되었다. [[毛利氏]] 를 討伐하기 위해 派遣된 中國攻掠 途中 織田信長 이 政變으로 [[明智光秀]]에게 죽임을 當하자 그는 서둘러 毛利氏와 和解하고 京으로 돌아와 [[山崎戰鬪]]에서 明智光秀를 물리쳤 다. 또한 織田信長의 孫子 [[ 三法師]]를 가지고 織田 政權 內部의 主導權 다툼에서 勝利하여 織田信長을 代身해 그의 事業을 繼承하고 自身의 政權을 確立했다. 豐臣秀吉은 武士로서는 처음으로 [[關白]]이 되었다. 朝廷의 權威를 背景으로 惣無事의 名目으로 各地의 大名에게 臣從을 要求하고, 北條氏를 무너뜨린 小田原 征伐로 天下 統一을 이룩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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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統一 後 豐臣 政權은 [[太閤檢地]], [[刀狩令]], [[石高制]] 等 全國的인 政策을 推進하여 日本 全國의 藏入地와 鑛山 輸入으로 莫大한 財力을 손에 넣었다. 宗敎的인 面에서는 佛敎 僧院을 保護하고 가톨릭의 宣敎와 流布를 抑制했으며, 西班牙 人 宣敎師들을 迫害했다. 後日 禁敎와 鎖國의 嚆矢가 되었다. 豐臣 政權은 [[聚樂第]], 京의 大佛, [[伏見城]] 等 大規模 建築物을 造營했으며, 豐臣秀吉은 [[茶道]], [[美術]] 工藝, [[藝能]]을 愛好하여 그 發展을 促進했다. 豐臣 時 代 에 [[日本]] [[文化]]는 蕃盛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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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理由는 諸說이 있지만 老年에는 [[明나라]] 征服을 決意하고 [[壬辰倭亂|朝鮮에 出兵]]했다. 이 侵略은 [[韓半島]] 사람들에게 깊은 苦痛을 안겨주었다. 그 渦中에 親아들 [[豐臣秀賴]]가 태어나자 後繼者로 定했던 조카 [[豐臣秀次]]를 排除하고 政權을 再構築해야 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豐臣秀吉은 病에 걸려 어린 豐臣秀賴를 五大老와 五奉行에게 맡기고 世上을 떠났다. 侵略 戰爭의 끝을 보기 前에 世上을 떠버린 탓에 日本軍의 撤軍으로 倭亂은 幕을 내리고, 政權의 支持 基盤을 다지는 것도 失敗해 自身의 死後에 政權이 무너지고 [[德川 家 康]]에게 權力이 넘어가는 端初를 남긴 人物이기도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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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이름 == |
| | 最初에는 木下藤吉郞秀吉라고 불렀다. 卽, 그의 [[ 苗字]] 는 木下, 通稱은 藤吉郞, [[ 諱]] 는 秀吉이었 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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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573年]]에는 苗字를 木下에서 羽柴로 바꾸었다. 羽柴의 由來에 對해서는 織田 勢力의 重臣 柴田勝家와 丹羽長秀에서 한 글字씩을 따왔다는 說이 있다. 當時 書狀에는 "羽柴藤吉郞秀吉"라고 署名되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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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秀吉은 氏는 勿論 姓도 없을 程度로 下層階級 出身으로 여겨지지만, 立身榮達하여 家系의 公稱이 必要하게 되자 秀吉은 平氏를 自稱했다. 이는 主君인 織田信長 을 模倣한 것으로 여겨진다. 平氏의 姓은 朝臣이었기 때문에 이 時期 秀吉의 全體 이름은 平朝臣羽柴藤吉郞秀吉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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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585年]]7月, 關白에 任命되면서 前 關白 近衞前久의 猶子가 되어 氏를 平에서 藤原로 改稱했다. 이듬해 太政大臣에 就任하면서 새로운 氏 "豐臣"을 創始하고 朝廷으로부터 名目上 이 氏를 授與받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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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秀吉이 右筆 大村由己에게 執筆하게 한 『任官之事』에서는 「옛 [[姓]]을 잇는다는 것은 [[사슴]]이나 [[ 소]]의 발자국을 밟는 것과 같다{{*|{{루비除去|古姓を繼ぐは鹿牛の陳跡を踏むがごとし}}}}」고 하여 單純한 前例 蹈襲은 拒否한다는 뜻을 밝히고 「나의 天下를 지켜 後代에 남겨주고자 한다. 다만 새롭게 다른 姓을 定하는 것으로 始作할 것이다{{*|{{루비除去|われ天下を保ち末代に名あり。ただ新たに別姓を定め濫觴たるべし}}}}」라고 하여 秀吉 스스로가 特別하고 傑出한 人物로써 旣存의 源平藤橘로 代表되는 武 家 의 氏에 이은 또 하나의 새로운 氏를 創始하였다, 는 하나의 宣言이었다. 이렇게 해서 그의 이름은 豐臣朝臣羽柴藤吉郞秀吉로 바뀌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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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日本]]은 [[神道]]와 [[佛敎]]의 影響을 많이 받았다. 그의 死後 神道의 神號는 豐國大明神, 佛敎의 戒名은 國泰祐松院殿靈山俊龍大居士라고 이름을 얻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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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明治維新]] 에 依해 旣存의 氏와 姓과 苗字, 그리고 諱와 通稱의 區分을 廢止하고, 모든 사람이 氏名을 慣習的으로 使用하게 되었다. 그래서 現代에는 一般的으 로 羽柴秀吉 또는 豐臣秀吉로 불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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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身後와 記念 == |
| | 1598年9月18日에 死亡한 豐臣秀吉의 遺體는 火葬하지 않고 伏見城 안에 安置되어 있었으나, 死亡 이듬해인 1599年4月13日, 遺命에 따라 方廣寺(京의 大佛이 있는 곳)의 東쪽 阿彌陀峰 頂上에 묻히고 그 山기슭에 高野山의 僧侶 木食應其에 依해 廟所이 세워진 것이 그 始作이다. 廟所는 "大佛의 鎭守社"라고 불 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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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月16日, 朝廷에서 豐國大明神의 神號를 附與받았다.{{*|『押小路文書』「宣命」}} 『豐國大明神臨時祭禮御日記』에 따르면 日本의 옛 이름인 "豐葦原中津國"에서 따온 것이지만, 豐臣의 氏도 意識한 것이었다. 神號 下賜 宣命에는 豐國大明神은 兵威를 異域萬里까지 휘두르는 武神으로 說明되어 있다. 4月18日에는 秀吉의 魂靈을 廟所으로 옮기는 儀式{{*|{{루비除去|遷宮の儀}}}}이 擧行되었고, 廟所는 豐國神社로 命名되었다. 4月19日에는 正一位 神階가 주어졌다{{*|『義演准后日記』}}. 日本에서는 드물게 平安하게 죽은 當代의 權力者를 神格化하여 神社에 神으로서 奉安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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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普通 神社에서 神格化된 人間, 卽 人神을 받들 때는, 該當 사람이 怨恨을 품고 죽어 世上에 害를 끼친다고 判斷할 때, 그 冤魂을 달래고자 지었다. 그러므로 平安하게 죽은 當代의 權力者를 神으로 모시는 것은 神道의 論理로 볼 때 무척 異常한 일이다. 그러나 살아서는 權力者로 온갖 富貴榮華를 누리고 죽어서는 神으로 받들 린 다니 그것 참 魅力的인 일이기도 하고, 銅像을 세우는 것과 마찬가지로 自身에 對한 記憶을, 그리고 그 後裔들을 團結시키는 象徵이 되는 等 虛榮心과 實益을 겸한 效果가 매우 컸다. 豐臣秀吉은 그러한 象徵을 노려 自己가 죽은 뒤 神社를 세우도록 미리 遺言을 남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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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또한 每年 4月18日과 8月18日 秀吉의 年忌에는 豐國祭라는 盛大한 祝祭가 열리게 되었다. 特히 1604年의 豐國祭는 "豐國祭禮圖屛風"에 그려지는 等 有名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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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러나 大坂의 陣에서 豐臣 宗家이 滅亡하자 德川家康의 뜻에 따라 德川家康가 方廣寺의 鎭守神으로 삼기{{*|『駿府記』, 『武德編年集成』}} 後水尾天皇의 勅許를 要求하여 豐國大明神이라는 神號를 剝奪되고 神社 自體도 廢社되었다. 더 以上 神이 아닌 秀吉에게는 國泰祐松院殿靈山俊龍大居士라는 佛敎의 戒名이 주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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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秀吉의 魂靈은 方廣寺 大佛殿 뒤쪽 南東쪽에 세워진 五輪石塔으로 옮겨졌다. 또한 秀吉의 遺體 自體는 靈屋과 함께 阿彌陀峰 山 꼭대기에 남겨졌다{{*|『雍州府志』}}.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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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秀吉의 아내 北政所의 懇曲한 付託으로 神社 社殿은 남겨졌지만, 以後 一切의 修理가 禁止되어 썩어가는 狀態로 放置되었다. 1640年에는 豐國神社의 옛 參拜길 內에 新日吉神社가 再建되면서 山頂으로 가는 通路 및 옛 社殿에 參拜할 수 있는 通路가 消滅했다. 이에 對해 "幕府의 意向에 따라 豐國神社 參拜路를 막았다"는 見解가 있는 反面, "新日吉神社 안에 秀吉 墓所 拜所 建設이 實質的인 豐國神社의 再興"이라고 보는 視角도 있 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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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幕府가 무너진 後 1868年 4月 明治天皇이 大阪에 行次했을 때, 秀吉을 "皇威를 海外에 宣揚하고 數百年이 지나도 感歎하게 하는, 國家에 큰 勳功이 있는 古今을 超越한 人物"이라고 賞讚하며 豐國神社의 再興을 布告하는 文書가 下達되었다. 1875年 京都 東山區에 社殿이 建立되고 宮司로 任命되었다. 1880年 方廣寺 大佛殿 옆에 세워진 새로운 社殿으로 옮겨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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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秀吉가 죽은 後 側近이었던 臨濟宗 僧侶 惠瓊은 秀吉의 遺髮을 不動院과 安國寺로 가져가 遺髮 무덤을 세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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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家族 == |
| | * 아버지: 木下彌右衞門 |
| | * 어머니: 大政所 |
| | * 正室: 高臺院 (淺野長勝의 養女) |
| | ** 養子: 木下利次 |
| | * 側室: 淀殿 (淺井長政의 딸) |
| | ** 첫째 아들: 豐臣鶴松 |
| | ** 둘째 아들: 豐臣秀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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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關聯文書 == | | == 關聯文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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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戰國三英傑]] | | * [[戰國三英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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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分類:戰國三英傑]] [[分類:壬辰倭亂]] [[分類:丁酉再亂]] | | [[分類:戰國三英傑]] |
| | [[分類:壬辰倭亂]] |
| | [[分類:丁酉再亂]] |
豐臣秀吉은 日本 戰國時代에 活躍한 武將으로 後에 大名가 되었다. 主君 織田信長의 征伐 事業을 이어받아 日本을 統一하는 데 成功하고, 百餘 年 持續된 四分五裂의 世上을 끝내고 權力의 頂點에 올랐다. 그는 16世紀 後半 日本의 事實上 最高 權力者였다.
戰國時代에 가장 出世한 人物로 有名하며, 微賤한 出身으로 태어나 日本 朝廷 最高의 자리인 關白까지 오른 人物이다.
織田信長, 德川家康과 함께 戰國三英傑로 불린다.
略歷 [編輯]
어린 時節에 對해서는 여러 가지 傳說이 있지만 明確하게 밝혀지지 않았으며, 一般的으로 尾張 地方의 가난한 農家 出身으로 여겨지고 있다. 尾張國의 大名 織田信長을 足輕[1]으로 섬기며 젊은 나이에 織田 家門의 有力한 武將이 되었다. 織田信長이 支配 領土를 擴張하는 過程에서 더욱 功을 세워 日本 中部 一部 地域(長濱, 但馬國, 播磨國)을 領有하는 織田 家門의 宿老 中 한 名이 되었다. 毛利氏를 討伐하기 위해 派遣된 中國攻掠 途中 織田信長이 政變으로 明智光秀에게 죽임을 當하자 그는 서둘러 毛利氏와 和解하고 京으로 돌아와 山崎戰鬪에서 明智光秀를 물리쳤다. 또한 織田信長의 孫子 三法師를 가지고 織田 政權 內部의 主導權 다툼에서 勝利하여 織田信長을 代身해 그의 事業을 繼承하고 自身의 政權을 確立했다. 豐臣秀吉은 武士로서는 처음으로 關白이 되었다. 朝廷의 權威를 背景으로 惣無事의 名目으로 各地의 大名에게 臣從을 要求하고, 北條氏를 무너뜨린 小田原 征伐로 天下統一을 이룩했다.
統一 後 豐臣 政權은 太閤檢地, 刀狩令, 石高制 等 全國的인 政策을 推進하여 日本 全國의 藏入地와 鑛山 輸入으로 莫大한 財力을 손에 넣었다. 宗敎的인 面에서는 佛敎 僧院을 保護하고 가톨릭의 宣敎와 流布를 抑制했으며, 西班牙人 宣敎師들을 迫害했다. 後日 禁敎와 鎖國의 嚆矢가 되었다. 豐臣 政權은 聚樂第, 京의 大佛, 伏見城 等 大規模 建築物을 造營했으며, 豐臣秀吉은 茶道, 美術 工藝, 藝能을 愛好하여 그 發展을 促進했다. 豐臣 時代에 日本 文化는 蕃盛했다.
理由는 諸說이 있지만 老年에는 明나라 征服을 決意하고 朝鮮에 出兵했다. 이 侵略은 韓半島 사람들에게 깊은 苦痛을 안겨주었다. 그 渦中에 親아들 豐臣秀賴가 태어나자 後繼者로 定했던 조카 豐臣秀次를 排除하고 政權을 再構築해야 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豐臣秀吉은 病에 걸려 어린 豐臣秀賴를 五大老와 五奉行에게 맡기고 世上을 떠났다. 侵略 戰爭의 끝을 보기 前에 世上을 떠버린 탓에 日本軍의 撤軍으로 倭亂은 幕을 내리고, 政權의 支持 基盤을 다지는 것도 失敗해 自身의 死後에 政權이 무너지고 德川家康에게 權力이 넘어가는 端初를 남긴 人物이기도 하다.
最初에는 木下藤吉郞秀吉라고 불렀다. 卽, 그의 苗字는 木下, 通稱은 藤吉郞, 諱는 秀吉이었다.
1573年에는 苗字를 木下에서 羽柴로 바꾸었다. 羽柴의 由來에 對해서는 織田 勢力의 重臣 柴田勝家와 丹羽長秀에서 한 글字씩을 따왔다는 說이 있다. 當時 書狀에는 "羽柴藤吉郞秀吉"라고 署名되어 있다.
秀吉은 氏는 勿論 姓도 없을 程度로 下層階級 出身으로 여겨지지만, 立身榮達하여 家系의 公稱이 必要하게 되자 秀吉은 平氏를 自稱했다. 이는 主君인 織田信長을 模倣한 것으로 여겨진다. 平氏의 姓은 朝臣이었기 때문에 이 時期 秀吉의 全體 이름은 平朝臣羽柴藤吉郞秀吉였다.
1585年7月, 關白에 任命되면서 前 關白 近衞前久의 猶子가 되어 氏를 平에서 藤原로 改稱했다. 이듬해 太政大臣에 就任하면서 새로운 氏 "豐臣"을 創始하고 朝廷으로부터 名目上 이 氏를 授與받았다.
秀吉이 右筆 大村由己에게 執筆하게 한 『任官之事』에서는 「옛 姓을 잇는다는 것은 사슴이나 소의 발자국을 밟는 것과 같다[2]」고 하여 單純한 前例 蹈襲은 拒否한다는 뜻을 밝히고 「나의 天下를 지켜 後代에 남겨주고자 한다. 다만 새롭게 다른 姓을 定하는 것으로 始作할 것이다[3]」라고 하여 秀吉 스스로가 特別하고 傑出한 人物로써 旣存의 源平藤橘로 代表되는 武家의 氏에 이은 또 하나의 새로운 氏를 創始하였다, 는 하나의 宣言이었다. 이렇게 해서 그의 이름은 豐臣朝臣羽柴藤吉郞秀吉로 바뀌었다.
日本은 神道와 佛敎의 影響을 많이 받았다. 그의 死後 神道의 神號는 豐國大明神, 佛敎의 戒名은 國泰祐松院殿靈山俊龍大居士라고 이름을 얻었다.
明治維新에 依해 旣存의 氏와 姓과 苗字, 그리고 諱와 通稱의 區分을 廢止하고, 모든 사람이 氏名을 慣習的으로 使用하게 되었다. 그래서 現代에는 一般的으로 羽柴秀吉 또는 豐臣秀吉로 불린다.
身後와 記念[編輯]
1598年9月18日에 死亡한 豐臣秀吉의 遺體는 火葬하지 않고 伏見城 안에 安置되어 있었으나, 死亡 이듬해인 1599年4月13日, 遺命에 따라 方廣寺(京의 大佛이 있는 곳)의 東쪽 阿彌陀峰 頂上에 묻히고 그 山기슭에 高野山의 僧侶 木食應其에 依해 廟所이 세워진 것이 그 始作이다. 廟所는 "大佛의 鎭守社"라고 불렀다.
4月16日, 朝廷에서 豐國大明神의 神號를 附與받았다.[4] 『豐國大明神臨時祭禮御日記』에 따르면 日本의 옛 이름인 "豐葦原中津國"에서 따온 것이지만, 豐臣의 氏도 意識한 것이었다. 神號 下賜 宣命에는 豐國大明神은 兵威를 異域萬里까지 휘두르는 武神으로 說明되어 있다. 4月18日에는 秀吉의 魂靈을 廟所으로 옮기는 儀式[5]이 擧行되었고, 廟所는 豐國神社로 命名되었다. 4月19日에는 正一位 神階가 주어졌다[6]. 日本에서는 드물게 平安하게 죽은 當代의 權力者를 神格化하여 神社에 神으로서 奉安되었다.
普通 神社에서 神格化된 人間, 卽 人神을 받들 때는, 該當 사람이 怨恨을 품고 죽어 世上에 害를 끼친다고 判斷할 때, 그 冤魂을 달래고자 지었다. 그러므로 平安하게 죽은 當代의 權力者를 神으로 모시는 것은 神道의 論理로 볼 때 무척 異常한 일이다. 그러나 살아서는 權力者로 온갖 富貴榮華를 누리고 죽어서는 神으로 받들린다니 그것 참 魅力的인 일이기도 하고, 銅像을 세우는 것과 마찬가지로 自身에 對한 記憶을, 그리고 그 後裔들을 團結시키는 象徵이 되는 等 虛榮心과 實益을 겸한 效果가 매우 컸다. 豐臣秀吉은 그러한 象徵을 노려 自己가 죽은 뒤 神社를 세우도록 미리 遺言을 남겼다.
또한 每年 4月18日과 8月18日 秀吉의 年忌에는 豐國祭라는 盛大한 祝祭가 열리게 되었다. 特히 1604年의 豐國祭는 "豐國祭禮圖屛風"에 그려지는 等 有名하다.
그러나 大坂의 陣에서 豐臣 宗家이 滅亡하자 德川家康의 뜻에 따라 德川家康가 方廣寺의 鎭守神으로 삼기[7] 後水尾天皇의 勅許를 要求하여 豐國大明神이라는 神號를 剝奪되고 神社 自體도 廢社되었다. 더 以上 神이 아닌 秀吉에게는 國泰祐松院殿靈山俊龍大居士라는 佛敎의 戒名이 주어졌다.
秀吉의 魂靈은 方廣寺 大佛殿 뒤쪽 南東쪽에 세워진 五輪石塔으로 옮겨졌다. 또한 秀吉의 遺體 自體는 靈屋과 함께 阿彌陀峰 山 꼭대기에 남겨졌다[8].
秀吉의 아내 北政所의 懇曲한 付託으로 神社 社殿은 남겨졌지만, 以後 一切의 修理가 禁止되어 썩어가는 狀態로 放置되었다. 1640年에는 豐國神社의 옛 參拜길 內에 新日吉神社가 再建되면서 山頂으로 가는 通路 및 옛 社殿에 參拜할 수 있는 通路가 消滅했다. 이에 對해 "幕府의 意向에 따라 豐國神社 參拜路를 막았다"는 見解가 있는 反面, "新日吉神社 안에 秀吉 墓所 拜所 建設이 實質的인 豐國神社의 再興"이라고 보는 視角도 있다.
幕府가 무너진 後 1868年 4月 明治天皇이 大阪에 行次했을 때, 秀吉을 "皇威를 海外에 宣揚하고 數百年이 지나도 感歎하게 하는, 國家에 큰 勳功이 있는 古今을 超越한 人物"이라고 賞讚하며 豐國神社의 再興을 布告하는 文書가 下達되었다. 1875年 京都 東山區에 社殿이 建立되고 宮司로 任命되었다. 1880年 方廣寺 大佛殿 옆에 세워진 새로운 社殿으로 옮겨졌다.
秀吉가 죽은 後 側近이었던 臨濟宗 僧侶 惠瓊은 秀吉의 遺髮을 不動院과 安國寺로 가져가 遺髮 무덤을 세웠다.
家族[編輯]
- 아버지: 木下彌右衞門
- 어머니: 大政所
- 正室: 高臺院 (淺野長勝의 養女)
- 側室: 淀殿 (淺井長政의 딸)
- 첫째 아들: 豐臣鶴松
- 둘째 아들: 豐臣秀賴
關聯文書[編輯]
- ↑ 兵卒이 되는 最下級의 武士
- ↑ 古姓を繼ぐは鹿牛の陳跡を踏むがごとし
- ↑ われ天下を保ち末代に名あり。ただ新たに別姓を定め濫觴たるべし
- ↑ 『押小路文書』「宣命」
- ↑ 遷宮の儀
- ↑ 『義演准后日記』
- ↑ 『駿府記』, 『武德編年集成』
- ↑ 『雍州府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