槪要[編輯]
日本東京都千代田區九段北3丁目1-1位置한 神社이다. 正式 名稱은 舊字體 表記인 “靖國神社”이며, 新字體로는 “靖国神社”이다. 補身 戰爭부터 第2次 世界 大戰 및 第1次 인도차이나 戰爭에 이르기까지의 日本軍 戰死者의 神位를 가지고 있는 靈廟의 性格을 띄고 있다. 日本 右翼들에게는 日本 帝國主義와 國家神토를 象徵하는 一種의 聖地(聖地) 取扱을 받지만, 第2次 世界 大戰 時期 日本 帝國의 戰爭犯罪者가 合祀된 關係로 只今도 國內外的으로 論難이 많은 場所이다.
特徵
靖國神社는 一旦 表面的으로는 日本국 政府와 直接的인 關聯이 없는 單純 宗敎法人이다. 그동안 日本 右翼들에 依한 國有化 試圖는 있었지만, 日本국 憲法이 保障하는 政敎分離의 原則上, 國家가 特定 宗敎施設을 所有하고 管理하는 것은 不適切하다는 反對 輿論이 거세서 番番이 막혀왔다. 參考로 日本 政府가 公式的으로 管理하는 第2次 世界大戰 犧牲者 追慕 施設은 치도리街후치 戰歿者 墓園으로, 靖國神社에 不快感을 표한 바 있는 버락 오바마 美國 大統領과 후진타오 中國 主席을 비롯한 外國 政治人들도 치도리街후치 戰歿者 墓園은 訪問하는 境遇가 있다.
靖國神社에는 男女老少 246萬 6532名의 이름, 本館, 生日, 死亡場所를 적은 文書가 奉安되어 있으며 屍身이나 遺骨은 없다. 靖國神社는 第2次 世界大戰 當時의 日本 帝國 戰爭 犯罪者들이나 帝國主義에 賦役했던 이들의 이름이 올려져 있기도 하며, 이를 알면서도 參拜하는 日本 政治人들이 있어 韓國이나 中國 等의 被害國들이 問題를 提起한다.
特히 이 中에는 日本 帝國에 依한 强制徵用 被害者들과 같은 合絲를 願하지 않는 사람들까지 包含되어 論難을 빚고 있는데 遺族들은 이러한 宗敎行爲에 拒否 意思를 표해왔으나, 靖國神社는 宗敎的 理由로 이를 默殺해 왔다. 이에 對해 日本 政府는 "靖國神社는 宗敎 施設이고, 合祀 問題는 宗敎의 自由와 聯關되기 때문에 政府가 關與하기 어렵다"는 態度를 取하고 있다. 허나 遺族 側은 "靖國神社가 總理나 國務大臣 等 政府 主要 人士들이 週期的으로 參拜하는 事實上의 國家 施設 性格을 띄는 마당에, 日本 政府가 宗敎의 自由 問題를 靖國神社 問題에 들이대는 것은 語不成說"이라고 批判한다.
事實 太平洋 戰爭 戰犯者들을 美化하는 空間이라는 點에서, 靖國神社는 美國 立場에서도 相當히 不快한 場所이다. 그런데 美日關係를 外交의 最優先으로 두는 日本 政府가 이를 放置하고 있는 것은 어떻게 보면 놀라운 일이다. 美國도 兩國關係를 생각해 韓國이나 中國만큼 强한 어필을 하진 않지만, 2014年에 한창 아베 政府가 깽판을 쳤을 때는 日本 政府에 憂慮를 표하며 警告하기도 했다.
甚至於 後述되어있듯 天皇도 이곳을 參拜하지 않고 있는 것을 볼 때, 대놓고 表出하지 않을 뿐 日本 황실도 야스쿠니 神社를 宗敎를 앞세운 事實上의 政治化된 施設로 보고 있다. 그럼에도 日本 政治人들이 參拜를 强行하는 것을 보면, 이는 日本의 相當數 政治人들이 日本 皇室과도 無關하게 國家신토와 情緖的으로 連結된 部分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한 斷面이라고 할 수 있다.
勿論, 이곳을 參拜하는 것이 美國의 神經을 긁고 있다는 것은 변함없는 事實이라 日本 政府에서도 軍事組織인 自衛隊와 關聯된 自家 靖國神社를 訪問하는 것만큼은 禁忌視하고 있다. 政治人은 몰라도 自衛隊는 直接的으로 軍事, 戰爭과 聯關된 組織이고 舊 日本軍과도 어느 程度 聯關되어 있는 만큼 過去 日本 帝國에 依해 被害를 입었던 當事國에 對한 直接的인 挑發로 비춰질 수 있어서 이것만큼은 日本 政府도 어떻게든 막으려고 한다. 그래서 2024年 1月 自衛隊員 數十 名이 參拜 目的으로 靖國神社를 訪問했을 때 가장 먼저 制裁에 나선 것은 韓國, 中國, 美國도 아닌 日本防衛省이었다. 前述한 微妙한 스탠스 때문에 參拜가 올바른가에 對해서는 얼버무리고 있는 點이 耳目을 끈다.
歷史
1869年 慕辰戰爭에서 死亡한 新政府軍이나 維新之社들을 기리기 위해 創建되어 1879年 近代射擊制度에 따라 別格館斃死(別格官幣社)로 指定되었다. 또한 勅祭社(勅祭社), 卽 天皇의 勅使가 禮物을 바치는 神社로도 指定되었는데, 1945年 基準 勅祭社 總 17곳 中에서 靖國神社를 除外한 나머지 16곳은 全部 官弊大使(官幣大社)였다. 별격관폐사였던 靖國神社가 칙祭祀로 選定된 것 自體가 대단한 特惠라고 할 수 있다.
1945年에 日本이 第2次 世界大戰에서 敗하고 聯合軍 最高司令部가 日本을 實質的으로 다스리게 되자, 1946年 旣存에 政府가 紳士의 等級을 매겨 管理하던 近代社祀制度를 廢止하였다. 따라서 以後로는 별격관폐사니 하는 區分도 사라지고 靖國神社는 法的으로는 政府와 關係 없는 民間 宗敎團體가 되었다. 그러나 如前히 政治權과 關聯이 깊다.
過去 칙祭祀로 選定되었던 神社에는 現代에도 如前히 天皇의 勅使가 定期的으로 찾아오는데, 靖國神社 또한 如前히 칙祭祀로 待遇받는다. 칙祭祀라고 해도 어떤 神社에는 天皇의 勅使가 몇 年에 한 番, 또는 1年에 한 番씩만 찾는다. 하지만 靖國神社에는 1年에 두 番, 春季/推計 預貸第 때마다 勅使가 派遣되므로 이 또한 特惠이다.
1867年 말 大政奉還과 王政復古가 일어나 江戶幕府가 끝나고 메이지 維新 時期가 始作되었다. 그러나 天皇이 이끄는 調整은 1000餘年에 가까운 歲月 동안 實際 國政에는 손을 놓았기 때문에 나라를 運營할 能力이 缺如되었으므로 거의 大部分 幕府 時節의 人事와 組織이 實務行政을 맡았다. 또한, 幕府는 形式上으로는 大權을 天皇에게 返還하였음에도 不拘하고 外交權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實際的인 權力을 손에 놓지 않았다. 그리하여 幕府 勢力과 反(反)幕府 勢力의 葛藤이 漸漸 커졌다.
結局 1868年 1月부터 이듬해 6月까지 1年 5個月에 걸쳐 무진戰爭이 일어난다. 이때 메이지 덴노는 半幕府 勢力을 間接的으로 支持했다. 結局 幕府軍이 敗北하고 사쓰마 番 等 半幕府 勢力이 勝利하여 새로이 調整을 構成하기에 이른다. 아직 무진戰爭 中이던 1868年 東徵大總督 有栖川宮熾仁親王은 에도 城을 接受하고 (음)4월에 자군 戰死者들을 爲한 慰靈祭를 지냈다.
그해 (음)5월에는 교토의 태정官 名義로 布告令이 내렸는데, 1853年 쿠로後네 內航 事件 以來 殉難者의 靈魂을 祭祀한다는 內容이 있었다. 이 布告令은 야스쿠니 神社 創建에도 影響을 끼쳤다. 이 해에 메이지 政府는 新不分離令을 내려 佛敎와 신토가 習合된 基本 日本 宗敎界를 佛敎化 新吐露 强制로 나누도록 했다. 이 時期에 日本 全域에서 많은 佛像과 法具, 寺刹이 破壞되었고 僧侶들이 强制還屬되었다. 國家神토를 爲한 事前布石이었다.
무진戰爭이 끝난 1869年 (음)6월 12日, 메이지 덴노는 天皇를 爲해 싸운 戰死者들을 위해 慰靈施設을 세우라는 命令을 내렸다. 그달 29日, 只今의 야스쿠니 神社 자리에 臨時施設을 만들어 軍務官知事 小松宮彰仁親王 神官이 되어 무진戰爭에서 死亡한 政府軍 死亡者 3588位를 위해 慰靈祭를 지냈다. 이때부터 야스쿠니 神社가 始作했는데, 創建 當時에는 東京 招魂辭(東京招魂社, 도쿄 쇼콘社)라 이름하였다. 卽, 魂을 불러 鎭靜케 하는 절이다. 事實 招魂, 卽 招魂이란 單語는 陰陽道 系統에서나 使用할 뿐, 다른 곳에서는 쓰이지 않았다. 굳이 쇼콘이라는 單語를 使用한 데에서 旣存의 日本 宗敎施設과는 뭔가 다르게 하겠다는 意圖를 읽을 수 있다. 本殿 建物은 1872年에야 完工했다.
日本의 旣存 傳統에서는 一旦 戰爭에서 勝利하여 慰靈祭를 지낸다면 我軍과 敵軍을 가리지 않고 供養하였으나[9], 쇼콘社는 明白히 幕府 側 戰死者를 排除하였다.
1870年, 메이지 덴노는 大敎宣布 勅令을 내렸다. 이는 國家神토를 日本의 事實上 國敎로 삼겠다는 意思表明이었다.
1871年, 東京招魂社가 日本 皇室의 문장인 菊花 文樣을 使用할 수 있는 許可를 받았다. 또한 理解부터 日本 政府는 日本 各地의 重要한 紳士들을 官幣大社, 國幣大社, 官幣中社, 國幣中社, 官幣小社, 國幣小社 巡으로 나누어 管理했다. 여기서 管斃死와 國弊社가 나뉘는데 天皇家에서 維持費를 대고 神에게 幣帛을 바치는 곳이 管斃死, 日本 政府 次元에서 維持費를 대고 幣帛을 바치는 곳이 國弊史였다. 觀菊斃死 中에서 格은 格은 當然히 官弊臺詞가 가장 높고 國弊소사가 가장 낮았다. 이렇게 日本 全域의 神社에 等級(格)을 매겨 管理하는 것을 近代射擊制度라고 하였다.
1872年, 重要하긴 한데 旣存의 射擊制度에 잘 맞지 않는 紳士가 있다는 理由로 別格官幣社 等級을 따로 만들어 官弊小祀에 準하여 待遇했다. 別格官幣社로 指定된 紳士들은 '天皇의 忠臣'을 諸神(祭神)으로 모셨다. 別格官幣社 等級을 만든 뒤 처음으로 指定한 施設이 14世紀 初 日本 南北朝時代 사람 구스盧키 마사시게를 모시는 湊川 神社라는 點에서도 別格官幣社의 特性을 斟酌할 수 있다.
1879年 6月, 國家神討議 象徵답게 紳士로 改編하면서 이름도 靖國, 卽 '나라를 평화롭게 한다'는 뜻으로 바꾸었다. 神佛分離令, 大橋宣布 勅令도 내렸는데, 佛敎스러운 이름을 使用하기 곤란하다는 理由로, 確實히 神社스러운 이름으로 바꾸었다. 靖國는 春秋左氏傳에서 由來한 單語로.
1879年, 靖國神社가 別格官幣社로 指定되어 正式으로 '重要神社'라는 公認을 받았다. 何必 '別格官幣社'라는 데에서 日本 政府가 靖國神社를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斟酌할 수 있다.
1887年, 靖國神社의 管轄主體가 육해군성으로 바뀌었다. 그 前까지는 육해군성뿐만이 아니라 內務省까지 3者가 共同으로 管轄하였다.
1945年 日本이 敗戰한 뒤 1年이 지난 1946年 2月, 宗敎法人令이 公表되어 射擊制度가 廢止되고 國家神土價 制度的으로 사라졌다. 그해 9月 靖國神社는 民間宗敎法人으로 바뀌었으나, 如前히 神社本廳의 管轄을 받지 않는 特殊한 紳士로 남았다. 1947年에 平和憲法이 公表되면서, 憲法의 宗敎自由 條項에 따라 一般 紳士들은 押留된 財産 等을 돌려받았다. 하지만 靖國神社를 비롯하여 地方의 護國紳士들은 除外되었다.
桑港講和條約으로 日本이 다시 獨立國이 된 1952年 10月에 쇼와 덴노와 고준 皇后 夫婦가 敗戰 以後 처음으로 야스쿠니 神社를 參拜했다. 日本 遺族會는 敗戰 移轉 야스쿠니 神社가 別格館斃死였을 때처럼 政府에게 豫算을 支援해달라고 要請했다. 또한 日本 遺族會는 吳모토에서 갈라진 新興宗敎 生長의 집(生長の家), 神社本廳 等 關聯 宗敎團體는 勿論 右翼團體까지 끌어모아 야스쿠니 國營化를 圖謀하기도 했다. 이들은 聯合軍 占領下 日本 時期에 撤去된 忠魂碑 等을 復舊했다.
時間이 지날수록 靖國神社와 自衛隊가 서로 露骨的으로 結託하는 等의 雰圍氣가 造成되자, 1967年 日本 自民黨에선 靖國神社의 宗敎性을 完全히 除去하려는 試圖를 하였다. 理由는 憲法이다. 日本 憲法에 明示된 政敎分離의 原則 때문에 宗敎團體 야스쿠니를 國營化할 수 없으니, 靖國自體를 宗敎團體가 아니게 만들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神社 本廳이나 遺族會가 極烈하게 反對하여 이 또한 霧散되었다.
자민당은 方策을 조금 바꾸어, 1968年부터 1973年까지 5番에 걸쳐 야스쿠니 神社를 特殊法人化하는 試圖를 했다. 이는 日本 憲法에서 政敎分離를 規定하기 때문에, 民間 宗敎團體 靖國神社를 國有化할 수 없다면 特殊法人으로 만들어 國有化하겠다는 意圖였다. 그러나 反對 勢力, 宗敎界에 依해 뜻을 접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