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麗(고려)

十八子(십팔자) (討論(토론) | 寄與(기여))님의 2023()11()27()())17()08() ()


韓國(한국)()
後三國(후삼국)時代(시대)
泰封(태봉) · 後百濟(후백제) · 新羅(신라)
高麗 朝鮮(조선)

高麗(고려)918() 王建(왕건)卽位(즉위)以後(이후), 1392() 李成桂(이성계)()滅亡(멸망)하기까지 韓半島(한반도)存在(존재)하던 國家(국가)이다. 또한 高麗(고려)外王(외왕)()()를 가장 積極的(적극적)으로 한 國家(국가)이며 高麗(고려)君主(군주)生前(생전)에는 皇帝(황제)()했으나 崩御(붕어) 以後(이후) 諡號(시호)大王(대왕)으로 올렸다.

歷史(역사)

高麗(고려)成立(성립)後三國(후삼국) 統一(통일)

10世紀(세기) () 新羅(신라)에서는 王位(왕위)爭奪戰(쟁탈전)頻繁(빈번)發生(발생)하여 政治(정치)混亂(혼란)해졌고 全國(전국) 各地(각지)에서는 租稅(조세)受取(수취)反撥(반발)하여 農民(농민) 蜂起(봉기)發生(발생)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地方(지방) 豪族(호족)들이 新羅(신라) 朝廷(조정)으로부터 獨立(독립)하여 各自(각자) 自身(자신)勢力(세력)을 키웠는데 그 ()에서도 新羅(신라) 眞骨(진골) 王族(왕족)이었던 弓裔(궁예)新羅(신라)將帥(장수)였던 甄萱(견훤)()勢力(세력)構築(구축)하였다. 甄萱(견훤)摩震(마진) 後百濟(후백제)自稱(자칭)했고, 곧 弓裔(궁예)泰封(태봉)을 세웠다. 이로써 新羅(신라), ()高句麗(고구려), 後百濟(후백제)가 서로 對立(대립)하게 되었는데, 이 時期(시기)後三國(후삼국)時代(시대)라 부른다.

以後(이후) 弓裔(궁예)失政(실정)을 거듭하고, 民心(민심)을 잃게 되자 이에 918() 統一新羅(통일신라) 松嶽(송악) 地方(지방)有望(유망)新羅(신라) 豪族(호족)이었던 王建(왕건)弓裔(궁예)를 몰아내고 임금의 자리에 올라 새로운 나라의 建國(건국)宣布(선포)하게 되는데 국호를 高麗(고려), 연호를 天授(천수)라고 하고, 919() 松嶽(송악)(開城(개성))으로 都邑(도읍)을 옮겼다. 그 側近(측근) 혹은 本人(본인)이 高句麗(고구려)血統(혈통)이었기 때문에 국호로 高麗(고려)使用(사용)하여 高句麗(고구려)後孫(후손)을 자처하는 데에는 王建(왕건)과 弓裔(궁예)가 다름이 없었다. 한편 926() 渤海(발해)가 요나라의 侵略(침략)을 받고 滅亡(멸망)하자, 渤海(발해)王族(왕족)을 비롯한 流民(유민)을 받아들여 勢力(세력)을 키웠다. 이는 王建(왕건)政治(정치)적·軍事(군사)基盤(기반)確固(확고)히 하였을 뿐만 아니라, 高句麗(고구려)에 대한 繼承(계승)意識(의식)確固(확고)히하면서 新羅(신라) 豪族(호족)으로서의 性格(성격) 역시 뚜렷이 나타내 주었다. 또한 對外(대외) 政策(정책)에서도 弓裔(궁예)와는 달리 ()新羅(신라) 政策(정책)을 썼다. 이는 新羅(신라)傳統(전통)權威(권위)繼承(계승)자가 되려고 한 것이었다. 王建(왕건)新羅(신라)保護(보호)하기 危害(위해) 金城(김성) () 50()의 땅에 神光(신광)()設置(설치)하여 高麗(고려)軍事(군사)駐屯(주둔)하게 하였다.

結局(결국) 新羅(신라) 敬順王(경순왕)新羅(신라)高麗(고려) 歸順(귀순)決定(결정)(결정)했고, 936()新羅(신라) 軍事(군사)와 함께 後百濟(후백제)敗亡(패망)시킴으로써 高麗(고려)後三國(후삼국)統一(통일)하였다.

光宗(광종)改革(개혁) 政治(정치)

太祖(태조)의 뒤를 이은 惠宗(혜종)과 定宗(정종) 때에는 ()()不安定(불안정)하여 皇族(황족)들과 外戚(외척)들 사이에 繼承(계승) 다툼이 일어났다. 이러한 王權(왕권)不安定(불안정)太祖(태조)가 後三國(후삼국)統一(통일)하는 過程(과정)에서 新羅(신라) 豪族(호족) 勢力(세력)糾合(규합)하기 위하여 取下(취하)였던 婚姻(혼인) 政策(정책) 때문에 나타난 副作用(부작용)이었다. 이런 狀況(상황)에서 卽位(즉위)한 光宗(광종)()()安定(안정)中央(중앙) 集權(집권) 體制(체제)確立(확립)하기 위한 政策(정책)推進(추진)하였다. 光宗(광종)은 奴婢按檢法(노비안검법)(956())을 實施(실시)하여 豪族(호족)들의 세력을 弱化(약화)시키고 國家(국가)收入(수입) 基盤(기반)擴大(확대)하였다. 이로써 功臣(공신)이나 豪族(호족)經濟(경제)적·軍事(군사)基盤(기반)弱化(약화)된 반면, 奴婢(노비)들은 良民(양민)이 되어 租稅(조세)賦役(부역)義務(의무)를 지게 되었으므로 國家(국가)財政(재정) 基盤(기반)()()安定(안정)되었다. 勿論(물론) 이는 高麗(고려) 貴族(귀족)들에 ()限界(한계)가 있긴 하였다. 崔承老(최승로)의 奴婢(노비)()()()奴婢(노비)()()()으로 풀려난 자들을 道路(도로) 奴婢(노비)로 만들었다.

957() 後周(후주)에서 歸化(귀화)한 ()()가 新羅(신라)의 讀書三品科(독서삼품과)繼承(계승)·擴張(확장)하자고 建議(건의)하였고, 958() 光宗(광종)은 문예와 儒敎(유교) 經典(경전)試驗(시험)하여 문반 管理(관리)選拔(선발)하는 過去(과거) 制度(제도)施行(시행)하였다. 過去(과거)功臣(공신)子弟(자제)優先(우선)적으로 登用(등용)하던 종래의 管理(관리) 등용 制度(제도)抑制(억제)하고, 새로운 管理(관리) 選拔(선발) 基準(기준)()()한 것이다. 이를 통하여 光宗(광종)儒學(유학)을 익힌 신진 人士(인사)登用(등용)하여 新舊(신구) 勢力(세력)交替(교체)圖謀(도모)하였다. 또한 이것은 文治主義(문치주의)轉換(전환)標示(표시)로, 무신 大臣(대신)文臣(문신)管理(관리)登用(등용)하려는 것이다. 文臣(문신)登用(등용)하는 基準(기준)은 儒敎(유교)에 두었다. 따라서 科擧制度(과거제도)實施(실시)王權(왕권)强化(강화)를 위한 새로운 官僚(관료) 體制(체제) 設定(설정)基礎(기초) 作業(작업)이었다. 이것을 安定(안정)시키기 위하여 ()()한 것이 百官(백관)의 公服(공복) 制定(제정)이었다. 복색을 制定(제정)함으로써 王權(왕권) 中心(중심)으로 貴族(귀족)층을 安定(안정)시키고 支配(지배)층의 位階(위계) 秩序(질서)確立(확립)하게 된다.

一連(일련)改革(개혁)을 통하여 自身(자신)감을 갖게 된 光宗(광종)本格的(본격적)으로 功臣(공신)豪族(호족) 勢力(세력)除去(제거)하여 王權(왕권)强化(강화)하였다. 이로써 王朝(왕조) 成立(성립) 初期(초기)功臣(공신)豪族(호족) 勢力(세력)이 크게 약화되고 王權(왕권)强化(강화)될 수 있었다. 또한 光宗(광종)은 스스로 皇帝(황제)라 칭하고, 開京(개경)皇都(황도)西京(서경)西都(서도)라 칭했으며, 光德(광덕)·()()이라는 독자적 年號(연호)使用(사용)하였다. 다만 高麗(고려) 國王(국왕)들은 스스로를 皇帝(황제)라 칭했으나 光宗(광종)처럼 對內(대내)외에 露骨的(노골적)으로 皇帝(황제)를 칭하지는 않았다. 이것은 高麗(고려) 外王(외왕)()()를 쓰는 國家(국가)였기 때문에 비롯된 것이다. 光宗(광종)改革(개혁)은 景宗(경종) 때의 經濟(경제) 改編(개편)으로 이어져 中央(중앙) 官僚(관료)들의 經濟(경제)基盤(기반)保障(보장)하기 위한 田柴科(전시과) 制度(제도)實施(실시)되었고, 成宗(성종) 때의 支配(지배) 體制(체제) 整備(정비)로 이어져 統治(통치) 體制(체제)確立(확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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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化(문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