安徽省出身이다. 李鴻章은 스승인 曾國藩을 따라 太平天國의 亂을 鎭壓하고 捻軍을 平定했으며, 大命을 받아 新式部隊인 淮軍을 編成했다. 戰功으로 直隸總督으로 昇進하여 北洋通商大臣을 兼任했다. 淸나라 朝廷의 外交, 軍事, 經濟等重要事務에 參與하고, 江南製造局, 輪船招商局, 上海同文館等의 洋務機關을 잇달아 設立했으며, 나아가 近代化된 海軍인 北洋水師를 編成하였다. 淸日戰爭에서 여러 失策으로 인해 北洋水師가 壞滅되었고, 戰後欽差大臣(特使)로 日本과 馬關條約을 締結했다.
1899年兩廣總督으로 任命되었고, 이듬해 義和團의 亂으로 인한 8個國聯合軍이 淸나라를 侵攻하자 南方各省이 淸나라 中央政府의 列強에 對한 宣戰命令을 따르기를 拒否하는 "東南互保"에 參加했다. 以後中央政府의 命을 받고 北上하여 聯合軍과 談判했다. 1901年, 李鴻章과 慶親王奕劻은 淸政府를 代表하여 列強과 辛丑條約을 締結하고, 곧 北京에서 病死하였다. 享年 79歲이다.
李鴻章의 生涯는 歷史學者들에 의해 다음과 같이 要約된다. 少年期에 科擧에 及第하고, 壯年期에는 軍務에 힘쓰며, 中年期에는 地方總督을 맡아, 晩年에는 洋務運動에 盡力하며 끊임없이 出世의 길을 걸었다. 그는 淸末洋務運動의 主要指導者 가운데 한 사람으로, 불씨가 꺼져가던 淸나라를 再興시키고자 恭親王等과 함께 改革을 試圖한 實權者中 한 名이었다. 그 功績으로 曾國藩, 張之洞, 左宗棠과 더불어 中興의 四大名臣으로 불린다.
西洋에서는 卓越한 外交官이자 協商者로 널리 알려졌으며, 어떤 이들은 그를 "中國의 비스마르크"로까지 稱하였다. 그러나 1894年淸日戰爭以來李鴻章은 淸末中國의 唐惶과 衰落의 文學的象徵으로 지내왔다.
現代中國에서 그의 評價는 如前히 論難이 많다. 政治的洞察의 不足과 外勢에 맞선 唯一한 大規模作戰(淸日戰爭)에서의 敗北로 인해 가장 酷毒한 批判을 받는 한편, 淸末工業化와 近代化의 開拓者라는 點, 뛰어난 外交手腕, 그리고 太平天國의 亂을 對抗한 國內軍事功績으로도 높이 評價된다. 그는 淸政府를 代表하여 一連의 不平等條約을 締結하였고, 個人的腐敗嫌疑亦是批判의 對象이 되었으나, 漸漸 더 많은 史料가 드러내면서 外國人과의 協商過程에서 보여준 그의 勇氣와 率直함이 再照明되고 있다. 비록 그가 締結한 多數의 條約이 中國에게 不公正하고 屈辱的인 것으로 여겨지더라도, 當時의 狀況 속에서 그가 發揮한 外交的努力은 결코 無視할 수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