二四式重機關銃이 開發되기 前, 中國의 大型武器工場들은 各各獨自的으로 重機關銃의 模造를 進行했다. 模倣의 主流는 獨逸製맥심機關銃과 美國製브라우닝水冷式重機關銃의 두 가지였다. 이들의 量産은 모두 原製造社로부터 權限을 取得하지 않았기 때문에, 技術者들은 逆工學을 通해 部品의 形狀과 크기를 測定하고 設計圖를 作成했다. 制度化된 製造工程나 品質管理監督이 缺如됐던 結果, 모든 武器工場에서 生産된 重機關銃은 品質管理가 不充分했다. 各省이 서로 다른 軍閥의 支配下에 있었다는 狀況은 武器生産基準이 亂立하는 狀態를 招來하기도 했다.
國民政府는 1930年代兵器規格을 統一할 때 一時的으로 佛蘭西에서 空冷式호치키스重機關銃을 調達하는 計劃을 세웠지만, 結局 이 計劃은 實行되지 않았다. 1934年8月23日, 財政部長인 孔祥煕는 獨逸의 工業製品貿易會社(Handelsgesellschaft für Industrielle Produkte)와 廬山에서 『中獨原資材 및 農産物과 工業 및 其他製品交換條約』을 締結했다. 條約에 따라 中國은 텅스텐鑛石이나 망간鑛石等戰略的原資材와 中國의 農産物을 獨逸의 工業製品, 特히 軍需品과 交換하여 入手하게 되었다. 이로써 中國과 獨逸 사이에서 大規模協力關係가 促進되었다. 또한 國民政府가 支配하는 南京의 金陵兵工廠은 1915年부터 맥심機關銃의 模倣型生産을 持續해 왔기 때문에, 獨逸에서 留學中이던 兵工署長俞大維가 獨逸과 交涉을 進行했다. 그 結果, 1934年에 獨逸陸軍兵器局으로부터 MG08 맥심重機關銃의 設計圖, 製造規格說明書, 部品形板을 寄贈받았다. 이는 獨逸이 맥심 制式重機關銃의 設計와 製造에 關한 모든 知識을 國民政府에 無償으로 提供한 것과 같은 措置였다.
兵工署와 金陵兵工廠은 關聯資料를 다시 對照하여 旣存의 맥심重機關銃量産機械의 公差와 製造工程을 修正하고 改良을 實施했다. 水冷式 맥심 機關銃은 1930年代에는 이미 戰場에서 檢證된 效果的인 武器였으며, 金陵兵工廠의 量産時에는 다른 國家의 맥심 機關銃設計를 混合하고 過去에 알려진 設計上의 問題도 修正했다. 外觀上의 가장 두드러진 差異는 兵工署가 MG08에서 銃臺를 新型三脚臺로 變更하고, 對空射擊用三脚臺와 照尺을 開發한 것이었다. 이에 必要에 따라 對空機關銃으로 使用할 수 있게 되었다.
1935年初에 試作型이 完成되었으며, 이 해는 民國紀元 24年이었기 때문에 "二四式重機關銃"이라는 이름이 붙여졌고, 같은 해 8月부터 量産이 始作되었다.
漢陽兵工廠에서 生産되던 브라우닝M1917重機關銃과 함께 國民黨이 이끄는 中華民國政府와 共産黨雙方에서 國共內戰까지 使用되었다. 中日戰爭에서 二四式은 一定程度日本軍의 九二式重機關銃을 制壓할 수 있었다. 國共內戰後, 共産黨이 세운 中華人民共和國에서는 二四式을 徐徐히 改造하여 蘇聯에서 供給받은 DPM機關銃이나 SG-43機關銃의 部品을 使用할 수 있도록 했다. 韓國戰爭에서는 當時共産黨側의 最前線部隊의 主力武器로 使用되었다. 1953年부터 蘇聯式武器의 生産을 導入함에 따라 二四式機關銃의 生産을 中止했다. 1960年代에는 二四式의 在庫品이 中共軍에서 退陣되어 民兵隊의 武裝用이나 對外支援用으로 使用되었다.
一部二四式이 越南民主共和國에 提供되어 主로 防空用途로 使用되었다. 越南戰爭까지 그 모습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中華民國政府가 臺灣으로 移轉한後, 金陵兵工廠이 喪失되었고, 또한 重機關銃의 戰場에서의 役割이 이미 重要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에, 二四式의 生産工程에 必要한 一連의 設備를 再構築하지 않았다. 그러나 部隊와 함께 臺灣으로 옮겨진 一部二四式機關銃은 第一線의 部隊에서 繼續使用되었다. 美國製裝備로의 換用作業이 進行되는 過程에서, 이 二四式들은 漸次M1919A4機關銃 및 M2機關銃으로 替代되었으며, 二四式은 博物館展示品이 되었다.
二四式은 基本的으로 MG08機關銃을 基盤으로 한다. MG08機關銃과의 差異點은 兩者의 노리쇠와 鞍裝이 다르다는 點이다. 二四式의 노리쇠는 脫着이 容易하며, 鞍裝設計도 더욱 簡素化되었다. 金陵兵工廠은 二四式에 對空射擊照準器와 三脚臺를 裝着하여 必要에 따라 對空兵器로 使用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二四式의 방아쇠는 MG08보다 操作이 便利하며, 어느 쪽을 눌러도 彈丸을 發射할 수 있다.
1945年, 國民政府의 兵工署는 年度報告書에서 寒帶地域에서의 作戰에 對應하기 위해 空冷式重機關銃의 硏究를 始作해야 한다고 提言했다. 寒冷한 環境에서는 空氣冷却을 통해 連射를 維持할 수 있었다. 따라서 兵工署는 滿洲國의 奉天造兵所를 接收한 後, 水冷圓筒을 갖추지 않은 空冷式二四式을 "三六式重機關銃"으로 命名하고 生産했다.
1946年中華民國國防部第6廳의 國防科學硏究發展年報에는, 이에 對해 다음과 같이 記載되어 있다: "…우리나라의 國防重點은 이미 北方으로 移動했으며, 北方의 氣候에 適應하기 위해 水冷式 맥심 重機關銃을 空冷式으로 改造할 必要가 생겼다…硏究結果를 바탕으로 試作이 完了되었으며, 試驗射擊結果는 良好했으며, 連續射擊 5,000發을 實施한 結果效果는 매우 優秀했다. 分當射擊速度는 650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