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우스 옥타비우스 아우구스투스는 로마國家[1]의 政治家이자 將軍이다. 元首(princeps) 職位를 맡은 最初의 人物이며, 王政時代를 包含해 로마의 第8代最高指導者이다. 그는 約 40餘年 동안 로마 國家를 統治하며 世界史에서 가장 重要한 人物中 한 名으로 손꼽힌다. 本名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투리누스(Gaius Octavius Thurinus)였다.
옥타비아氏族(Gens Octavia)의 騎士身分(equites)을 가진 한 分家에서 태어났다. 옥타비우스는 外할머니의 兄弟인 獨裁官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 養子로 入養되었다. 어린 時節부터 雄辯術과 修辭學, 多樣한 人文學을 熱心히 배워 뛰어난 學識을 쌓았다. 또한 카이사르를 따라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사이의 內戰에서 히스파니아遠征에 參與했으며, 그 後아폴로니아로 보내져 軍事訓練을 받았다. 카이사르는 遺言을 통해 그를 自身의 地位의 後繼者로 指名했다.
紀元前44年 카이사르가 政敵들에게 殺害된 後, 옥타비우스는 政治舞臺에 登場했다. 그는 카이사르의 옛 部下들의 忠誠을 얻기 위해 온 힘을 쏟았고, 民衆과 그들의 擁護를 바탕으로 빠르게 로마 國家의 政治生活에서 中心人物로 떠올랐다. 國家가 非常事態에서 그는 元老院議員으로 任命되었고, 紀元前43年軍隊를 이끌고 로마市로 進軍해 政權을 奪取한 뒤, 當時最年少民選執政官이 되었다.
옥타비우스는 안토니우스, 레피두스와 함께 三頭政治라는 軍事政權을 樹立했다. 執政官으로서 그는 로마市와 여러 屬州를 效果的으로 統治하며 勢力을 키워 나갔다. 紀元前42年 안토니우스와 함께 필리피戰鬪에서 元老院反카이사르派의 指導者인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를 물리쳤고, 이를 통해 三頭政權은 마침내 모든 反對勢力을 制壓했다. 그러나 곧 三頭政權內部에서 權力鬪爭이 勃發하게 되었다. 紀元前36年 그는 레피두스의 軍權을 剝奪한 뒤, 紀元前31年악티움海戰에서 안토니우스를 擊破하고 아이깁투스를 侵攻해 프톨레마이오스王國을 滅亡시켰다. 안토니우스와 그의 아내인 프톨레마이오스王國의 女王클레오파트라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一連의 內戰 끝에 勝者가 된 그는 로마市로 돌아와 國家의 大權을 掌握하기 始作했다.
옥타비우스는 로마의 上流層과 合議를 이루었다. 卽, 그는 元老院과 政務官制度[2], 立法機關을 中心으로 한 國家體制를 尊重하고 繼續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가 軍隊와 國家의 折半에 該當하는 屬州를 統制하고 있다는 事實은, 그가 로마軍의 總司令官으로 就任하게 될 것임을 意味한다. 게다가 그는 이 總司令官地位를 利用해 法的으로 認定된 強力한 權限을 行使할 수 있다.
紀元前36年頃, 그는 元老院으로부터 護民官權限中 하나인 神聖不可侵權(sacrosanctitas)을 받았다. 紀元前29年, 元老院은 그가 統帥(imperator)라는 稱號를 使用하는 것을 認可했다. 紀元前27年1月16日元老院으로부터 "至尊"(augustus, 아우구스투스)라는 尊號를 받았다.
그는 同時에 元老院首席(princeps senatus), 執政官, 大神官(pontifex maximus) 等의 職責도 兼任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常任 및 非常任職務를 모두 遂行했다.
옥타비우스가 莫強한 權力을 掌握할 수 있었던 것은 財政的成功, 戰爭과 征服을 통해 確保한 資源, 全國各地에 構築된 庇護關係(clientela), 兵士들과 退役軍人들의 忠誠,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元老院에서 授與받은 數많은 稱號와 實權職位에서 派生된 權力, 그리고 民衆의 尊敬德分이었다. 그가 로마軍大部分을 緻密하게 統制할 수 있었던 점은 元老院을 牽制하는 手段이 되었으며, 이를 통해 元老院의 方策決定에 影響을 미칠 수 있었다.
그는 로마 政府를 改組하고 國家의 軍事體制를 改革하여 常備軍과 小規模海上部隊, 그리고 中樞를 防禦하기 위한 護衛隊를 編成했다. 이 護衛隊는 主로 로마市와 伊太利地域에 駐屯하였다. 또한 稅制를 改善하고 傳令制度를 갖춘 道路網을 發展했으며, 로마市에 警察과 消防組織을 設立하고 市內相當部分의 區域을 再開發했다. 對外的으로는 領土를 大幅擴張하여, 西쪽에서는 이베리아半島를 征服하고 北쪽에서는 다뉴브江과 라인江一帶까지 進出했으며, 南쪽에서는 阿弗利加大陸에서 國家의 領土를 擴大하여 地中海沿岸全域을 로마의 統治 아래 統合했다. 國境 밖에는 屬國들로 이루어진 緩衝地帶를 마련함으로써 國土의 基盤을 鞏固히 했다. 그는 時勢를 正確히 把握하고 進退를 適切히 判斷하는 데 能熟했으며, 일을 處理할 때는 機智가 豐富하고 果敢하면서도 愼重하며 堅實했다. 카이사르 被殺以降持續되던 政情不安에 終止符를 찍었고, 權力을 잡은 뒤 施行한 一連의 對內對外政策은 相對的으로 安定된 政治局面을 造成하여 로마圈에 200年에 걸친 平和와 繁榮을 가져다주었다.
紀元14年, 그는 75歲의 나이로 死歿했다. 自然死한 것으로 推定되지만, 아내 리비아가 그를 毒殺했다는 所聞도 있었다. 그 後, 리비아의 아들 티베리우스, 卽 옥타비우스의 의붓아들이자 사위인 人物이 옥타비우스의 뒤를 이었다.
옥타비우스가 死亡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元老院과 民會(concilium plebis)는 그를 神으로 推戴했고, 로마人들은 그를 崇拜하기 始作했다. 그 以來로 모든 로마 國家의 指導者들은 그의 稱號인 "아우구스투스"와 "카이사르"를 이름의 構成要素로 使用하게 되었다.
또한 그가 生存해 在位中이던 때, 그를 기리기 위해 로마曆의 旣存 "第8의 月"(Sextilis)을 "아우구스투스月"(Augustus)로 改稱하였으며, 이 이름은 라틴語를 거쳐 後代의 西歐言語들로 傳해져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後世의 一部 사람들은 그를 로마 國家를 "共和政"에서 "帝政"으로 變貌시킨 創始者로 看做하지만, 그의 在位期間 동안 로마 國家의 政治에는 劇的인 變化가 일어나지 않았고, 如前히 從來의 體制가 維持되었다. 그의 統治時期에서 두드러진 特徵은 元老院의 國政에 대한 影響力弱化와 元首崇拜의 浮上뿐이다. 로마 國家의 體制變遷은 實際로 옥타비우스 死後數百年에 걸쳐 이어진 漸進的인 過程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