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平陵의 變은 三國時代 魏나라에서 일어난 重大한 政變이다.
後漢 末期, 曹操가 魏王으로 封해진 뒤 司馬懿를 太子中庶子로 삼아 曹丕를 輔佐하게 했다. 曹丕가 漢을 代身해 帝位에 오른 後, 臨終에 이르러 司馬懿와 曹眞 等을 攝政으로 指名하며 太子인 曹叡가 卽位한 뒤 그를 輔弼하라고 當付했다. 曹叡가 在位할 때, 司馬懿는 撫軍大將軍, 大將軍, 太尉 等 重職을 歷任했다. 曹叡가 崩御하자 幼帝 曹芳을 司馬懿와 曹爽에게 맡겼다. 曹芳이 卽位한 以後 曹爽의 勢力과 司馬懿의 勢力 사이에서 表面上의 葛藤과 裏面의 權謀術數이 벌어졌다.
司馬懿는 曹爽에게 밀려 太傅로 轉任되어 實權을 잃었다. 曹爽은 心腹들을 朝廷의 要職에 앉혔다. 이에 司馬懿는 好機를 기다리며 反擊의 힘을 모으기 위해 病을 핑계로 辭任했다. 한편 그는 아들 司馬師, 司馬昭와 太尉 蔣濟 等과 隱密히 政變 準備를 進行하고 있었다.
249年, 司馬懿는 曹爽과 魏帝 曹芳이 高平陵에 參拜하러 간 틈을 타 政變을 일으켜 都城 洛陽을 掌握했다. 司馬懿는 布告文에서 曹爽이 大將軍 在任 中에 저지른 갖가지 惡行을 列擧하고, 先帝 曹叡로부터 重責을 맡았음을 強調하며 이번 措置는 國家와 社稷을 危難에서 救하고 朝廷의 風氣를 바로잡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政變의 目的이 오직 曹爽에게 兵權을 返納시키고 退任하게 하는 데 있을 뿐, 그 外의 意圖는 없다고 主張했다. 曹叡 時代부터 오랜 歲月 高位 官職을 맡아 높은 威信을 누려온 많은 元老 重臣들도 이를 擔保했고, 게다가 司馬懿는 洛水를 向해 神明에게 盟誓하기까지 했다.
曹爽은 司馬懿가 自身과 一家를 赦免하겠다는 約束을 믿고 抵抗 없이 降服하여 權力을 내놓았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司馬懿는 捏造된 罪目을 들어 曹爽과 그의 兄弟, 그리고 그 一派가 魏帝에 對한 叛亂을 謀議했다고 指摘하며 曹爽 一家와 徒黨들을 모조리 處刑했다. 이로써 曹爽의 勢力은 壞滅되었다.
이 以後 魏의 政治權力과 軍事權力은 大體로 司馬 一族이 掌握하게 되었고, 曹氏 皇帝는 司馬氏의 꼭두각시로 轉落했다. 後날 司馬氏가 曹魏의 政權을 篡奪하고 晉나라를 建國하는 土臺가 되었다.
더 나아가 이 事件은 以後 兩晉南北朝 時期의 思想, 卽 竹林七賢이나 玄學 等에도 至大한 影響을 미쳤다.
- 皇帝 曹芳
- 大將軍 曹爽
- 中領軍 曹羲
- 武衛將軍 曹訓
- 散騎常侍 曹彥
- 吏部尙書 何晏
- 散騎侍郞 丁謐
- 侍中 鄧颺
- 大司農 桓範
- 荊州刺史 李勝
- 司隸校尉 畢軌
- 太傅 司馬懿
- 中護軍 司馬師 - 그 傘下에는 3千 名의 私兵 外에도, 中護軍으로서의 職務 範圍 內에서 指揮할 수 있는 一部 禁軍 兵士들이 있었다.
- 議郞 司馬昭
- 尙書令 司馬孚
- 太僕 王觀
- 司徒 高柔
- 太尉 蔣濟
- 皇太后 郭氏
- 侍中 許允
- 尙書 陳泰
- 殿中校尉 尹大目
- 司馬 魯芝
- 參軍 辛敞
- 都監 張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