司馬炎은 晉나라의 初代 皇帝이다. 字는 安世이다.
司馬炎의 出身은 河內司馬氏 一族이다. 魏의 末期, 그의 祖父인 司馬懿, 伯父인 司馬師, 父親인 司馬昭가 잇따라 朝政을 掌握했다. 父親 司馬昭가 權力을 쥐고 있을 때에는 그 一系이 晉王의 爵位를 얻어 이미 魏帝를 代身할 만한 趨勢를 갖추고 있었다. 264年, 司馬炎은 王世子로 세워졌고, 이듬해 司馬昭가 逝去하자 司馬炎은 相國을 이어 就任했으며, 晉王의 爵位도 承襲했다. 266年2月, 魏帝 曹奐을 禪讓으로 몰아내고 帝位에 올라 晉을 建立했다. 卽位 當初, 魏의 宗室이 藩屛 役割을 할 수 없을 程度로 無力했기 때문에 그의 父祖들에게 틈을 주었고, 魏 皇室이 孤立되어 滅亡한 經緯를 考慮하여, 同姓 諸王을 널리 封하고, 宗室인 몇몇 王들에게 重兵을 統率하게 하여 要地에 鎭守시켰다. 그는 法律 改定을 重視했으며, 公布한 『晉律』은 中國 古代에서의 重要한 法典이다.
279年, 軍隊를 南下시켜 이듬해에 吳를 滅亡시키고 天下統一을 實現했다. 그동안 占田制와 戶調制 等을 施行하여 生產을 發展시켰고, 吳를 滅亡시키고 統一한 後에는 元來 吳와 蜀漢 地域의 百姓들을 北쪽으로 불러들여 華北을 充實히 했다. 一連의 措置가 人口 增加를 促進했고, 經濟와 社會는 繁榮의 樣相을 띠었다. 그러나 天下가 安定됨에 따라 그는 漸次 政務를 소홀히 하고 女色에 耽溺하며 後宮을 擴大하여 荒淫을 極에 達했다. 이로 인해 支配層 全體에 奢侈와 荒淫의 風潮가 널리 蔓延하게 되었다. 그는 知能이 낮은 司馬衷을 太子로 세우는 것을 固執했으며, 統一 前後에는 諸王들에게 封地에 가서 權力을 掌握하도록 命하고 州郡의 武備를 廢止했다. 이는 晉의 短命한 統治 覆滅에 깊은 伏線이 되었다. 290年, 司馬炎은 都城 洛陽에서 病歿하여 享年 55歲였다. 諡號는 武皇帝, 廟號는 世祖로 定해졌다. 世祖武皇帝라고 불린다.
諸王들은 本來 中央 政權을 護衛하기 위해 세워졌으나, 司馬炎의 死後 諸王들은 中央 政權을 다투기 위해 16年에 걸친 內亂을 일으켰으며, 歷史上 "八王의 亂"으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