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番째 줄: | 9番째 줄: | ||
== 歷史 == | == 歷史 == | ||
=== 高麗의 成立과 後三國 統一 === | === 高麗의 成立과 後三國 統一 === | ||
10世紀 初 新羅 에서는 王位爭奪戰이 頻繁히發生하여 政治가 混亂해졌 고 全國 各地 에 서는 租稅受取에 反撥 하 여 農民 蜂起가 發生 하 였 다. 이러한 가운데 地方 豪族들 이 新羅 朝廷으 로 부터 獨立 하여 各自 自身 의 勢力 을 키웠 는 데 그 中 에 서도 新羅 眞骨 王 族이었던 弓裔 와 新羅 의 將帥였던 甄萱이 强 한 勢力을 構築하였 다. 甄萱 이 摩震 後百濟를 自稱했고, 곧 弓裔 가 泰封 을 세웠 다. 이 로써 新羅, 後高句麗, 後百濟 가 서로 對立하게 되 었 는데, 이 時期 를 [[ 後三國時代]] 라 부른 다. | |||
結局 新羅 敬順王은 新羅의 高麗 歸順을 決定했고, 936年에 新羅 軍事와 함께 後百濟를 敗亡시킴으로써 高麗는 後三國을 統一하였다. | 以後 弓裔가 失政을 거듭하고, 民心을 잃게 되자 이에 918年 統一新羅 松嶽 地方의 有望한 新羅 豪族이었던 王建은 弓裔를 몰아내고 임금의 자리에 올라 새로운 나라의 建國을 宣布하게 되는데 국호를 高麗, 연호를 天授라고 하고, 919年 松嶽(開城)으로 都邑을 옮겼다. 그 側近 혹은 本人이 高句麗의 血統이었기 때문에 국호로 高麗를 使用하여 高句麗의 後孫을 자처하는 데에는 王建과 弓裔가 다름이 없었다. 한편 926年 渤海가 요나라의 侵略을 받고 滅亡하자, 渤海의 王族을 비롯한 流民을 받아들여 勢力을 키웠다. 이는 王建의 政治적·軍事적 基盤을 確固히 하였을 뿐만 아니라, 高句麗에 대한 繼承意識을 確固히하면서 新羅 豪族으로서의 性格 역시 뚜렷이 나타내 주었다. 또한 對外 政策에서도 弓裔와는 달리 親新羅 政策을 썼다. 이는 新羅의 傳統과 權威의 繼承자가 되려고 한 것이었다. 王建은 新羅를 保護하기 危害 金城 北 50里의 땅에 神光鎭을 設置하여 高麗의 軍事를 駐屯하게 하였다. | ||
結局 新羅 敬順王은 新羅의 高麗 歸順을 決定(결정) 했고, 936年에 新羅 軍事와 함께 後百濟를 敗亡시킴으로써 高麗는 後三國을 統一하였다. | |||
=== 光宗의 改革 政治 === | === 光宗의 改革 政治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