玄燁이 8歲 때, 그의 아버지 順治帝가 崩御했다. 順治帝는 臨終時 가톨릭 宣敎師아담 샬(湯若望)의 助言을 따라 어린 세 番째 皇子玄燁을 皇太子로 指名하고 皇帝의 자리를 물려주었다. 順治帝의 遺命을 따라, 새 皇帝가 아직 어렸기 때문에 國政은 順治帝가 指定한 네 名의 輔政大臣에게 맡겨지게 되었다. 네 名의 大臣中오보이(鰲拜)는 順治帝의 遺命을 내세워 獨斷專行하며, 甚至於罪名을 造作해 朝臣을 陷穽에 빠뜨리고 權力을 獨占했다. 1667年, 14歲의 康煕帝는 親政을 實施하도록 勅令을 내렸다. 1669年, 康煕帝는 오보이의 長期的인 專橫과 朝政의 混亂을 理由로 策略을 使用해 그를 逮捕하고 親政의 障礙를 完全히 排除했다.
그 政權初期, 淸나라 內外의 情勢는 매우 深刻했다. 이 狀況을 對處하기 위해 對外的으로는 各地의 反淸勢力에 對해 大規模征伐을 展開해 國土의 保全과 統一을 實現했다. 1681年에는 옛 明나라의 將軍인 세 名의 藩王이 이끈 叛亂을 制壓했으며, 1683年에는 臺灣을 平定해 明나라의 마지막 殘存勢力을 消滅시켰다. 1689年露西亞의 侵攻軍을 擊退하고 尼布楚條約을 締結해 淸나라이 黑龍江流域의 主權을 確保했다. 1696年에는 蒙古 준가르 部族의 首長갈단에게 세 次例의 征討를 통해 勝利를 거두었다. 對內的으로는 中央集權을 强化하고 階層間 및 民族間對立을 緩和하는 方針을 採擇했으며, 施政方式에서는 寬容仁愛를 一貫되게 維持했다. 仁政을 標榜하고 儒學을 尊崇하며 漢族의 士人을 懷柔하고, 會盟을 實施해 蒙古各部를 安撫시키며 티베트 活佛반첸을 冊封했다. 또한 輕徭薄賦政策을 推進하고, 農業을 重視하며 商業을 奬勵하고, 稅制를 改革하며 漕運을 整備했다. 또한 海關을 設置해 對外貿易을 發展시키고, 外國宣敎師를 重用하며 西歐의 近代科學을 배웠다.
老年의 康煕帝는 前半生의 偉業에 빠져 政務에 지쳐가게 되었다. 그의 仁政의 過度한 强調는 官僚體系의 頹廢를 招來했으며, 많은 社會問題를 일으켰다. 또한, 廢太子事件으로 인한 皇位繼承葛藤은 政治에 惡影響을 미쳤다. 1722年, 康煕帝는 北京의 暢春園에서 崩御했으며, 享年 69歲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