槪要
Toadyism 또는 Flunkyism
事大主義는 큰 나라(大)를 섬기는(事) 思想을 意味 한다. 事大主義와 慕華主義를 合쳐 事大慕華라고도 한다.
意見
擁護論
事實 이 用語는 西歐의 植民主義 프레임에 東아시아 外交關係를 꿰어 맞추면서 "한 國家가 自律性을 抛棄하고 强한 國家에 服從하거나 盲目的으로 追從하려는 思想 또는 外交方針"을 槪念化하기 위하여 創案되었다.
國際 關係에서는 언제나 相對的으로 弱한 나라가 剛한 나라의 눈치를 봐왔다. 이건 靑銅器 時代에 古代 國家가 登場한 以來로 現在까지 東西洋 어느 나라를 莫論하고 共通으로 있어온 普遍的인 일이었다.
中國은 秦始皇 以來로 유라시아 大陸 東쪽인 東아시아에서 獨步的인 巨大權力이었다. 前近代 時期 中國은 千兆國이란 名稱에 걸맞게 軍事的, 文化的, 經濟的으로 타 東아시아 國家보다 앞서 있었기 때문에, 이들과 交流를 하면서 文化를 발전시키는 게 利得이었지, 쓸데없이 對立關係를 取할 必要가 없었다. 다른 東아시아 國家가 歷史上 中國 大陸의 國家들과 對等한 關係를 맺거나 比等比等하게 影響力을 行使했던 때는 中國이 分裂期를 맞았을 때를 除外하고는 없었다. 韓國史를 例示로 들 때, 中國 大陸의 國家가 韓半島를 征服할 만한 軍事力을 가진 境遇는 漢나라와 唐나라, 元나라를 除外하고는 거의 없었지만, 當時 東아시아에서 中國 大陸 國家와의 交流는 傳統的으로 事大의 形式으로만 可能했으며, 形式的으로 臣下를 自處했을 때만 可能한 것이지 同等한 關係에서의 外交는 거의 不可能했다.
이러한 意味에서 "事大"는 外交의 한 形態로 活用되었다. 한족과 맞짱떴던 無數한 異民族 國家들이 一時的으로 中國을 征服했다가도 오히려 大部分 한족에게 同化되어 밀려났지만, 韓半島 國家들은 맞짱떠서 中國을 征服한 歷史는 없더라도 "事大"의 形式으로 固有한 文化와 正體性을 維持하면서 現在까지 命脈을 이어올 수 있었다.
아울러 文化, 制度的인 側面에서도 近代 以前까지만 해도 中國은 當時 東아시아 文明의 中心地였기 때문에 저 큰 兄님이 實際로 學識도 높고, 貴한 物件도 많고, 저렇게 適當히 脾胃 맞춰주면 그럭저럭 너그럽게 베풀기도 하는 便이니 이걸 利用한 것이라 보면 된다. 中國은 이미 漢나라 때부터 장건과 半草가 開拓한 緋緞길로 中央아시아를 비롯한 西洋圈과 交易을 했으며, 唐나라에 이르러서는 首都 長安이 國際都市的인 性格을 가지게 될 程度로 다양한 文明이 直接的으로 만나는 國家였다. 게다가 中國은 名目上 事大의 例로 朝貢을 要求하기는 했으나, 天子의 體面이라는 名目下에 朝貢品 以上의 物件을 하사했고, 이는 朝鮮에 있어서는 利得보는 장사였다. 오죽하면, 朝鮮 때 使臣이 明나라를 訪問하자 '朝鮮의 使臣은 너무 자주 오는 것 아니냐?'며 使節團 交流를 좀 줄이자고 付託하던 境遇도 있었다. 勿論 德을 베푼다는 儒敎 思想의 影響力에서 相對的으로 더 자유로웠던 나라들은 一般的으로 朝貢에서 損害를 보지 않고 利益을 보았다. 事情이 이렇다보니 現實的인 立場에서 親하게 지내는 것이 當然하다.
當時 中國은 東아시아의 秩序에서 마치 現在의 美國과 같은 位相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면 된다. 옛날같은 時代 狀況에서 별다른 意味도 없이 中國과 敵對關係를 持續해 왔다면 先進文物을 導入할 수 있는 經路가 막히고 國家 發展이 사그라들어 結局은 滿洲처럼 中國의 一介 地方으로 轉落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推測도 있다. 事大라는건 그냥 形式的이고 名分的인 치레였을 뿐이다. 眞心으로 따르는 것이라고 보기 힘든 것은 羅唐戰爭의 例로 알 수 있다. 羅唐戰爭은 新羅가 唐나라 領域을 먼저 攻擊하면서 始作되었다.
地政學的으로도 日本처럼 孤立된 섬나라라면 상관없겠지만, 韓半島의 境遇 몽골高原 等地에서 꼬리를 물고 發興해온 世界 最强의 戰鬪 民族들과 直接的인 戰爭을 반드시 避해야 했다. 이들 北方 遊牧民族의 힘은 中國 程度 되니까 그나마 버틸 수 있었던 것이고 그 마저도 몽골이나 滿洲(여진)族에게는 本土가 털렸었다. 이런 獨步的인 强大國 中國이나, 或은 이런 强大國 中國조차도 떡失神시키던 몽골族이나 滿洲族과 같은 戰鬪民族들이 韓半島로 侵攻해온다는 것은 韓民族 國家의 滅亡이나 다름없어 事大는 必須的인 戰略이었다. 實際로도 世界史를 보면 어떤 地域의 强大國을 박살낸 遊牧民族은 周邊 地域들도 죄다 焦土化를 시켜버리는 境遇가 많았다. 中國을 깨부술 수 있는 能力을 지녔음을 立證한 淸나라나 元나라만 봐도 리즈 時節 때에 軍事的으로 弱하지는 않았다. 또한 戰力으로 보면 騎兵은 當時 戰車, 裝甲車, 험비나 마찬가지라 그런 걸 수만 代 或은 數十萬 臺까지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는 遊牧民族들과 그런 遊牧民族들을 買收하여 離間질, 분열시키거나 古典시킬 수 있는 農耕 大帝國들은 決코 만만한 相對가 아니었다. 歷史에서 로마 帝國의 事例만 봐도 로마 같은 優秀한 文物, 巨大한 規模를 가진 農耕 帝國조차 正常的으로 어느 程度 돌아가는 農耕 帝國을 무너뜨리기가 쉽지 않음을 보여준다. 世界史的으로도 周邊의 帝國들에게 形式上 事大를 하는 民族들이나 나라는 많았다.
오히려 韓半島로서는 차라리 어느 程度 價値觀을 共有할 수 있는 農耕 文化圈인 中國과 連帶하는 것이 餘震이나 몽골 같은 遊牧+牧畜 民族들의 掠奪과 戰爭에 對處하는 데 훨씬 나은 選擇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中世 後半 以後로 갑툭튀하여 東아시아 全 海岸을 휩쓸었던 倭寇에 對한 대처도 그렇고. 現實的으로 거란이나 몽골의 侵略에서 宋나라가 高麗를 도와준 일은 없었지만, 明나라 같은 境遇 이만주 項目에서 보듯 女眞族을 共同으로 對處한 境遇도 있었고 朝鮮이 倭寇를 討伐했다는 名目으로 使臣을 派遣하고 明나라에서 이를 致賀해 하사한 境遇도 있었다.
바다 위에서 大陸과 떨어졌다는 地理 條件 德澤에 强大國의 侵略에서 자유로웠던 섬나라 日本은 이러한 歷史를 비틀어 만든 事大主義라는 槪念으로 韓國의 歷史를 貶下했다. 日帝强占期 日本의 造船社學者들은 中國과 朝鮮 사이의 不均衡한 力學關係와 朝鮮 中後期 朝鮮이 보였던 찌질한 모습들을 들추어 이를 韓國史 全般의 特徵으로 聯關시켰고, 이를 朝鮮總督府 官吏들에게 朝鮮統治의 指針書로 提供하기도 하였다. 近代 韓國民俗學에 相當한 學術 成果를 쌓은 것으로 評價받는 代表 植民史學者人 다카하시 盜壘는 3.1 運動마저도 中國 事大主義에서 美國 事大主義로 轉換한 것이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그들이 朝鮮蔑視의 前提로 삼은 日本의 자주 獨立이 實際로는 地政學 與件의 優位에 말미암은 것임을 考慮하지 않았다. 韓國의 獨立運動 陣營도 舊韓末에 더 以上 中國이 最高가 아님을 깨닫고, 내셔널리즘의 成長과 함께 日帝의 干涉과 植民統治에 맞서 自主性을 强調하다보니 自主性과 맞지 않던 過去 韓半島 國家의 事大는 外勢 依存으로 貶下하고 非難했다.
事大主義에서 價値頃盜賊인 搜査를 除外하고 추려 보면, 霸權國家와 同盟 關係를 維持하고, 앞선 文物을 받아들이려는 努力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事大主義는 예나 只今이나 世界 各國의 國力에 懸隔한 差異가 있고, 超强大國이 世界 秩序를 다스리는 國際 現實에서 모든 國家가 生存 및 發展을 위해서라면 利用해야 할 戰略인 셈이다.
또한 朝鮮人들이 明나라를 따르고 讚揚한 것은 그저 그 나라를 讚揚한 게 아니라, 當代 中國의 文明이 이미 朝鮮을 앞서갔기 때문이다. 中國의 先進 文物 等을 다시 朝鮮이 中國을 통해 받아들일 수 있었고, 그렇게 하는 것이 朝鮮에 利得이 되었기 때문이다. 世宗大王 때 만든 七政算度 中國의 授時曆과 中國을 통해 들어온 아랍의 回回曆을 바탕으로 만든 것이며, 訓民正音 또한 中國의 言語學 書籍과 音韻 關聯 書籍을 硏究하여 創製된 것이다.
小中華主義度 옛 中華 文物이 낡은 것으로 여겨지는 現代에는 一見 답답해 보일 수 있겠지만, 事實 現代 韓國人들도 그 때 當時와 같은 狀況이라면 當代 朝鮮人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萬若 3次 世界大戰이 勃發하여 中國과 러시아가 美國, 日本 및 西歐圈을 무너뜨리고 地球上에 오직 韓國만이 唯一한 民主 國家로 남았다고 假定해 보자. 살아남은 韓國人들이 獨裁 國家인 中國, 러시아와 다르게 自身들은 西歐式 民主主義를 繼承한 唯一한 國家라며 自負心을 보이는 게 異常할까? 이와 비슷하게, 西洋에서도 로마 帝國의 文物을 받아들인 유럽 民族들이 로마 滅亡 後에는 너도 나도 로마의 後繼國을 自處했다.
또한 事大主義關聯으로 朝鮮을 非難하는 이들이 看過하는것이 後期 朝鮮이 明나라를 마냥 稱頌한것만은 絶對 아니라는것이다. 代表的으로 明나라의 萬曆帝에 對해 朝鮮이 萬東廟를 지으며 祭祀 지내준것과는 別個로 朝鮮 亦是 萬曆帝가 暗君인건 認知하고 이點에 對해서는 매우 否定的이었는데 當場 朝鮮王朝實錄에서는 천계제는 怨望할 수 없으나 萬曆帝가 政事를 돌보지 않은점은 絶對로 본받지 말아야한다고 警告하는 記錄이 있다.("사리에 어두운 賃金은 怨望하지 않는 法이니, 天啓皇帝는 怨望할 수 없는 賃金에 該當됩니다. 그러나 萬曆皇帝는 初年에 靈媒하고 호걸스럽던 임금이었는데도 四十 年 동안 王位에 있으면서 臣僚들을 隣接한 적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境界로 삼아야 할 일입니다.")
또한 朝鮮 朝廷에서는 明나라가 亡했다는 消息을 듣고 나라가 亡했음에도 自決한 忠臣이 없는것에 對해 皇帝가 임금답지 못해 志操와 節槪있는자들이 떠나가서 그렇다고 明나라를 디스하는 記錄도 存在한다.
批判論
事大主義는 時代의 變化에도 不拘하고 그 흐름을 타지 못하는 데 寄與했다.
明淸交替期 以後에는 淸나라를 正統으로 認定하지 않으면서 朝鮮이 곧 明나라의 精神을 繼承했다는 精神勝利法的인 小中華思想이 擡頭되었다. 事大主義는 큰 나라를 盲目的으로 따르는 것이지만, 明나라가 오랑캐(淸나라)에게 滅亡하면서 朝鮮이 섬겨야 할 '큰 나라'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 小中華思想의 情緖는 明淸交替 以後 韓國, 日本, 베트남에서 共通的으로 나타난다. 朝鮮의 小中華라는 槪念은 王朝는 滅亡했지만 中華 文化가 如前히 中國 땅에 存在하고 있고, 精神的으로는 오랑캐의 나라인 請보다 大國이니 中和를 如前히 섬기는 우리가 바로 事實상의 작은 中華라는 槪念이기 때문이다. 小中華主義는 自國優越主義的 面貌를 보이면서도 基本的으로는 中國에 對한 事大主義에서 派生된 것이다.
卽 '小人輩 나라, 오랑캐 나라, 精神的으로 작은 나라인 請이 精神的으로 偉大한 對人배의 나라 小中華 朝鮮에 事大하는 것이 儒敎原理에 따르면 옳은 것이지만 淸나라 오랑캐들은 無識하면서 힘만 센 野蠻人들이므로 一旦 겉으로만 請을 섬기는 척한다'라는 意味가 된다. 當時의 思想으로 보면, 淸나라는 겉보기에 크기만 클 뿐 決코 大國이 아니었고 수많은 오랑캐 雜것들 中 하나일 뿐이었다. 當然히 現實的으로는 朝鮮의 20倍가 넘는 人口를 갖고 있고 壓倒的으로 莫强한 國力을 자랑하더라도, 現實을 否定하고자 하는 儒學者들의 觀念 上에서는 '작은 나라'인 請이 事大의 對象일 수는 없는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靑 建國 以後에도 朝鮮은 '事大主義의 論理'를 決코 버리지 않았다. 다만 스스로를 師大를 하는 나라에서 받는 나라로 規定했을 뿐이다. 實際로 그 사대라는 것을 받아본 적은 없고 오히려 거짓으로라도 오랑캐 나라에 事大하는 우스운 地境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이와 같이 韓半島의 境遇 歷史的으로 丙子胡亂 以後 朝鮮 後期까지 事大主義가 小中華主義로 變化하면서 淸나라와의 交易, 交流를 妨害하였다.
朝鮮의 事大主義가 小中華主義로 變質된 것은 朝鮮의 滅亡을 加速시켰다고 볼 수도 있는데 그나마 宋나라나 元나라를 통해 어느 程度는 外部의 文物을 받아들이고 있던 以前에 비해 後期에 들어서는 中國을 除外한 外部와의 交流가 거의 斷絶되었고, 明나라를 通한 制限的인 文物만 받아들이다가 나중에 淸나라가 建國되면서는 亡한 明나라 그 時節에 基準이 固定돼버려서, 청을 通해 發展된 신문물을 받아들이자는 史上(北學派)이 賣國奴 取扱을 받아야 했다. 朝鮮의 爲政者들은 뒤떨어진 朝鮮을 발전시킬 方案은 내놓지 않으면서 하는 짓이라는 것은 죽은 明나라 皇帝의 祭祀를 지내는 것 뿐이었고, 이것은 1937年(年度의 錯誤가 아니다!) 까지도 이어지고 있었다.
念頭에 두어야 할 것은, 여기서 말하는 明나라 皇帝는 萬曆帝로, 事大主義에 立脚해 祭祀를 지낸 것이 아니다. 1930年代가 어떤 時代인가. 日帝의 植民地 政策은 日帝 自體가 中日戰爭과 世界大戰의 火魔로 뛰어들며 露骨的인 파시즘의 影響을 받은 民族抹殺政策이란 至極히 暴壓的인 方向으로 더 惡化되고, 그나마 남아있던 獨立運動家들은 主로 中華民國에서 장제스의 國府軍 支援아래 싸우고 있던 時節이다. 이 時節에 萬東廟에서 祭祀를 지낸다는 건 單純한 傳統의 發露일 뿐만 아니라 至極히 微妙하고도 尖銳한 政治的 메세지가 담긴 行爲로 解釋하는게 더 자연스럽다.
작은 것이 큰 것을 섬긴다는 '事大'라는 槪念은 一旦 儒敎의 基本 觀念 中 하나였다는 點을 理解할 必要가 있다. '子息은 父母를 섬기고, 弟子는 스승을 섬기고, 臣下는 임금을 섬기고, 지어미는 지아비를 섬기고, 나이 어린 사람은 나이 많은 사람을 섬기고, 작은 나라는 큰 나라를 섬겨야 한다'는 생각은 朝鮮時代 儒敎的 觀點에서 보면 너무도 當然한 것이었다. 따지고 보면 忠과 孝라는 것도 작은 것(臣下, 子息)李 큰 것(왕, 父母)을 섬긴다는 事大의 論理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때문에 '큰 나라에 事大를 하지 않는 것'은 不孝, 不忠과 다름 없게 되는 것이다.
事例
高句麗
高句麗-水 戰爭을 이끈 嬰陽王은 隋文帝에게 自身을 '搖動이라는 똥땅에 있는 臣下 아무개(遼東糞土臣某: 搖動墳土申某)'라 하며 先制 侵攻한 것을 謝過하자 隋文帝는 憤怒를 풀고 爵位를 回復하여 주었으며 마찬가지로 麗水戰爭에서 活躍한 영류왕은 戰爭은 勝利했음에도 高句麗 領土 한복판에서 벌어진 亂離통에 對한 厭症을 느꼈는지 被害 回復 期間을 갖기 위해 당태종에게 和親 政策을 펼쳤다.
百濟
高句麗에 依해 首都 慰禮城이 守勢에 몰렸을 때 蓋鹵王이 北魏에 援助를 要請하는 國書를 보냈는데 그 內容이 相當히 屈辱的인데 백제의 公主를 後宮의 淸掃夫로, 子弟들을 馬廏間지기로 보내겠다는 內容이다.
백제 國王은 代代로 南朝에 朝貢을 바치고 冊封을 받았다. 一例로 武寧王은 永同大將軍이라는 稱號를 받았는데 中國에서 받은 이 稱號를 武寧王陵 誌石에도 表記할 程度로 매우 자랑스러워 한 것으로 보인다.
新羅
統一 以前 新羅는 官服의 樣式을 바꾸어 黨과 같이 하였으며, 그間 行해왔던 新羅 固有의 年號를 廢止하고 黨의 年號를 使用하도록 했다. 이는 新羅가 唐나라 中心의 天下 秩序에 歸屬하겠다는 것을 公式的으로 表明한 것이었다.
羅唐戰爭은 事大主義란 것의 矛盾이 가장 크게 드러난 事件 中 하나다. 新羅가 搖動과 熊津都督府의 唐나라 領域을 먼저 攻擊하면서 7年間의 戰爭이 始作되었는데, 정작 戰爭터에서는 싸우는 渦中에 中國에는 謝罪社를 보내는 等 形式上의 事大는 繼續되었다. 卽 '攻擊해서 罪悚했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정작 하던 攻擊은 멈추지 않고 繼續하고 있는 셈. 이런 謝罪社는 唐나라가 誤判하게 하는 時間벌기용이자 唐나라가 戰爭을 그만두도록 名分을 쌓아주는 것이었고 結局 몇 次例 決定的 攻擊을 新羅가 막아낸 以後 곧 戰爭이 끝나고 머지않아 國交가 再開되었다.
渤海
唐나라와 朝貢-冊封 關係를 樹立했으며 黨의 長安城을 본따 首都 上京용천부를 區劃했고 中央 組織 亦是 唐나라式으로 整備했다.
高麗
‘權’은 臨時라는 뜻이고 ‘知’는 맡는다는 뜻이므로, 權知國事는 "아직 冊封을 받지 못한 期間 동안에 臨時로 나랏일을 맡아 다스린다"라는 뜻을 가진 稱號로서, 權署國事라고도 한다. 高麗는 太祖 王建의 王朝 創建 以後 王이 卽位하면 中國에 이를 알리어 承認을 받아야만 王이라고 稱할 수 있었다. 高麗 太祖 王建은 權知高麗國王事라는 稱號를 記錄上 最初로 使用하였고 以後 이러한 傳統은 後代의 高麗王들에게까지 一種의 慣例로서 繼續 이어지게 되었다.
光宗은 年號를 光德, 峻豊으로 삼고 稱帝建元 하였지만 宋나라와 거란이 激烈하게 抗議하자 結局 뜻을 거둔 채 稱帝建元을 取消하였고 宋나라를 千자국으로 認定하고 宋의 年號인 乾德을 使用하였다.
成宗은 994年 6月, 宋나라에 '高麗는 眞心으로는 송을 따르고 있으며 거란을 憎惡한다'는 國書를 보냈다. 單純히 外交的 有不利 때문뿐만 아니라 成宗은 重빠로서 儒敎의 思想을 따르고 中國의 制度를 들여오길 좋아했다.
穆宗이 997年에 吏部侍郞 主人邵를 宋에 派遣하여 高麗가 中和를 思慕하고 있으나 오랑캐 거란에 막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는 國書를 보냈다.
穆宗이 西京의 이름을 鎬京으로 바꾸었다. 鎬은 周나라의 首都였다. 以後에 好景은 다시 西京으로 이름이 돌아오나 光宗이 바꿨던 이름인 西都와 같이 西京의 別稱으로 쓰이게 되었다. 人種 時期의 大花宮 稚魚에서도 서경이 '鎬京'으로 나오고 毅宗이 人種에게 만들어 올린 玉冊에도 妙淸의 亂이 '鎬京之亂'이라 나온다.
1125年 금태종은 高麗에서 온 國書를 接受하기를 拒否했는데, 그 理由는 國書의 棲息이 表가 아니고 또 高麗 王이 臣을 稱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金나라는 考慮에 對해 遼나라를 섬겼던 것처럼 金나라를 섬기라고 해 稱臣事大의 關係를 要求했는데, 이것을 旣定事實化하려는 것이었다. 高麗는 이에 對해 한동안 아무런 措置를 取하지 못하고 있다가 이듬해 1126年 朝廷 會議에서 金나라와의 關係 設定 問題를 協議했다. 大多數는 女眞族이 오랑캐이므로 相對할 수 없다고 했으나 實權者 李資謙과 여진 征伐에 參與했던 拓俊京 等이 "金나라가 예전에는 작은 나라로써 高麗와 遼나라를 섬겼으나 只今은 强大해져 遼나라와 北宋을 멸망시켜 政治的, 軍事的 强國이 되었고, 우리와 接境해 諸般 情勢가 私貸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또한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은 先王의 法도이니 마땅히 먼저 使臣을 보내 例를 지키는 것이 좋다"고 했고 人種은 이 主張을 採擇했다. 이어 4月 人種은 鄭應文 等을 金나라에 보내 自身을 臣이라 해 事大의 例로 國交를 맺게 되었다.
武臣政權 期間 中 임연이 쿠데타를 일으켜 김준을 죽이자 事大主義的이었던 元宗은 前任 執權者인 김준 때부터 武臣들에게 人氣가 좋았던 안경공 窓에게 선양을 하였다. 그리고 몽골帝國에는 原從이 病 때문에 讓位했다 하였다. 하지만 몽골에 있던 世子가 쿠빌라이 칸에게 알리자 몽골에 事大的이었던 原種을 支持하던 몽골이 反撥하였고 世子가 몽골軍까지 끌고 歸國하자 林衍은 結局 힘에 屈服하여 다시 元宗을 王位에 복귀시켰다. 그리고 復位된 원종대에 開京으로 還都하게 된다.
朝鮮
李成桂가 高麗 王位를 簒奪하고 나라를 세우자 明나라는 李成桂를 권지고려국사라며 王으로 認定하지 않는다. 開國勢力은 明나라 皇帝에게 王으로 任命되기 위해 努力하며 箕子朝鮮을 잇는다는 意味로 朝鮮이란 國名을 提示하여 允許받고 朝鮮을 세우며 以後 明나라에 事大한다.
淸州 韓氏, 利川 徐氏, 太原 鮮于氏, 행주 奇氏는 記者와 箕子朝鮮의 王들이 祖上이라며 자랑스러워 했다.
太宗이 諸侯國의 制度로 自體的인 諸侯를 冊封하는것은 禮法上 맞지 않다고 한 以後 朝鮮은 '皇帝'에게 冊封 받은 作位인 朝鮮王 王爵하나만을 除外하고 中國 君主가 아닌 韓國 君主가 自體的으로 임명하는 一切의 王爵과 五等爵 爵位를 없애 버린다.
太宗은 "조금이라도 事大의 禮를 잃어서는 안되며, 마땅히 王보다 높여 至誠으로 天子의 使臣을 섬겨야 한다."는 遺訓을 내리며 '恩惠를 맞이 한다'는 意味의 迎恩門을 세웠다. 또한 바로 옆에는 '中和를 欽慕한다'는 意味의 使臣 迎賓館이었던 慕華館도 있었다. 이 둘은 中國에서 皇帝의 使臣이 올 때 거처가는 곳이었으며 皇帝의 臣下였던 諸侯國 朝鮮의 王은 이곳까지 直接 마중을 나가서 使臣을 맞이 했다. 이때 當然히 朝鮮王은 天子의 臣下로서 中國 使臣과 서로 맞절을 해야 했다.
宣祖는 光海君은 明나라 皇帝에게 世子로 冊封을 받지 않았다는 것을 가지고 光海君을 排斥하는 名分으로 使用했다.
壬辰倭亂과 丁酉再亂이라는 亡國의 危機를 明나라의 萬曆帝가 高麗天子 또는 朝鮮皇帝라는 비아냥까지 들어가며 22萬 大軍과 쌀 100萬섬이라는 國庫金에다 內帑金까지 消耗해서 엄청난 物量을 쏟아부으며 朝鮮을 起死回生 시키며 살려주자 朝鮮에는 再造之恩이라는 義理의 觀念이 피어난다. 以後 淸나라가 强해져서 明나라 路線이 外交的으로 不利해져도 盲目的으로 오직 明나라만 따라야 한다는 主張이 得勢하였고 名이 請에 亡하자 恩惠를 갚자는 北伐論度 일어난다. 民間에서는 丙子胡亂 以後 淸나라에 社對하여 淸國皇帝를 上國으로 모시지만 眞正한 天子는 오직 明나라 皇帝라며 마지막 明나라 皇帝였던 崇禎帝의 年號를 使用하고 碑石에는 有明朝鮮國이라며 明나라에 있는 造船國이라는 文句를 使用하며 萬曆帝를 追慕하는 大報壇과 萬東廟를 세우며 信仰에 가까운 明나라 崇拜意識이 생겨난다.
世界 最初의 兒童用 敎科書인 童蒙先習에는 '中國人이 작은 中華라고 稱讚하니 이 어찌 記者가 남긴 敎化가 아니겠는가? 아! 어린이들은 마땅히 이 것을 보고 感動하여 奮發해야 한다.'라는 대목이 있다.
開化期에 西洋 여러나라의 異樣船들이 朝鮮에 通商을 하자 請하면 朝鮮은 恒常 拒否하였는데 그 理由는 朝鮮은 淸나라의 屬國이므로 自體的인 外交 決定權의 權限이 없어서 淸나라의 許諾이 必要하다는 것이 外交上의 公式答辯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