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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以後 弓裔가 失政을 거듭하고, 民心을 잃게 되자 이에 918年 統一新羅 松嶽 地方의 有望한 新羅 豪族이었던 王建은 弓裔를 몰아내고 임금의 자리에 올라 새로운 나라의 建國을 宣布하게 되는데 국호를 高麗, 연호를 天授라고 하고, 919年 松嶽(開城)으로 都邑을 옮겼다. 그 側近 혹은 本人이 高句麗의 血統이었기 때문에 국호로 高麗를 使用하여 高句麗의 後孫을 자처하는 데에는 王建과 弓裔가 다름이 없었다. 한편 926年 渤海가 요나라의 侵略을 받고 滅亡하자, 渤海의 王族을 비롯한 流民을 받아들여 勢力을 키웠다. 이는 王建의 政治적·軍事적 基盤을 確固히 하였을 뿐만 아니라, 高句麗에 대한 繼承意識을 確固히하면서 新羅 豪族으로서의 性格 역시 뚜렷이 나타내 주었다. 또한 對外 政策에서도 弓裔와는 달리 親新羅 政策을 썼다. 이는 新羅의 傳統과 權威의 繼承자가 되려고 한 것이었다. 王建은 新羅를 保護하기 危害 金城 北 50里의 땅에 神光鎭을 設置하여 高麗의 軍事를 駐屯하게 하였다. | | 以後 弓裔가 失政을 거듭하고, 民心을 잃게 되자 이에 918年 統一新羅 松嶽 地方의 有望한 新羅 豪族이었던 王建은 弓裔를 몰아내고 임금의 자리에 올라 새로운 나라의 建國을 宣布하게 되는데 국호를 高麗, 연호를 天授라고 하고, 919年 松嶽(開城)으로 都邑을 옮겼다. 그 側近 혹은 本人이 高句麗의 血統이었기 때문에 국호로 高麗를 使用하여 高句麗의 後孫을 자처하는 데에는 王建과 弓裔가 다름이 없었다. 한편 926年 渤海가 요나라의 侵略을 받고 滅亡하자, 渤海의 王族을 비롯한 流民을 받아들여 勢力을 키웠다. 이는 王建의 政治적·軍事적 基盤을 確固히 하였을 뿐만 아니라, 高句麗에 대한 繼承意識을 確固히하면서 新羅 豪族으로서의 性格 역시 뚜렷이 나타내 주었다. 또한 對外 政策에서도 弓裔와는 달리 親新羅 政策을 썼다. 이는 新羅의 傳統과 權威의 繼承자가 되려고 한 것이었다. 王建은 新羅를 保護하기 危害 金城 北 50里의 땅에 神光鎭을 設置하여 高麗의 軍事를 駐屯하게 하였다. |
| 結局 新羅 敬順王은 新羅의 高麗 歸順을 決定(결정)했고, 936年에 新羅 軍事와 함께 後百濟를 敗亡시킴으로써 高麗는 後三國을 統一하였다. | | 結局 新羅 敬順王은 新羅의 高麗 歸順을 決定(결정)했고, 936年에 新羅 軍事와 함께 後百濟를 敗亡시킴으로써 高麗는 後三國을 統一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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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光宗의 改革 政治'''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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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太祖의 뒤를 이은 惠宗과 定宗 때에는 皇權이 不安定하여 皇族들과 外戚들 사이에 繼承 다툼이 일어났다. 이러한 王權의 不安定은 太祖가 後三國을 統一하는 過程에서 新羅 豪族 勢力을 糾合하기 위하여 取下였던 婚姻 政策 때문에 나타난 副作用이었다. |
| | 이런 狀況에서 卽位한 光宗은 皇權의 安定과 中央 集權 體制를 確立하기 위한 政策을 推進하였다. 光宗은 奴婢按檢法(956年)을 實施하여 豪族들의 세력을 弱化시키고 國家의 收入 基盤을 擴大하였다. 이로써 功臣이나 豪族의 經濟적·軍事적 基盤이 弱化된 반면, 奴婢들은 良民이 되어 租稅와 賦役의 義務를 지게 되었으므로 國家의 財政 基盤과 皇權이 安定되었다. 勿論 이는 高麗 貴族들에 依해 限界가 있긴 하였다. 崔承老의 奴婢還遷法은 奴婢安檢法으로 풀려난 자들을 道路 奴婢로 만들었다. |
| | 957年 後周에서 歸化한 雙冀가 新羅의 讀書三品科를 繼承·擴張하자고 建議하였고, 958年 光宗은 문예와 儒敎 經典을 試驗하여 문반 管理를 選拔하는 過去 制度를 施行하였다. 過去는 功臣의 子弟를 優先적으로 登用하던 종래의 管理 등용 制度를 抑制하고, 새로운 管理 選拔 基準을 磨鍊한 것이다. 이를 통하여 光宗은 儒學을 익힌 신진 人士를 登用하여 新舊 勢力의 交替를 圖謀하였다. 또한 이것은 文治主義로 轉換한 標示로, 무신 大臣에 文臣을 管理로 登用하려는 것이다. 文臣을 登用하는 基準은 儒敎에 두었다. 따라서 科擧制度의 實施는 王權의 强化를 위한 새로운 官僚 體制 設定의 基礎 作業이었다. 이것을 安定시키기 위하여 磨鍊한 것이 百官의 公服 制定이었다. 복색을 制定함으로써 王權 中心으로 貴族층을 安定시키고 支配층의 位階 秩序를 確立하게 된다. |
| | 一連의 改革을 통하여 自身감을 갖게 된 光宗은 本格的으로 功臣과 豪族 勢力을 除去하여 王權을 强化하였다. 이로써 王朝 成立 初期의 功臣과 豪族 勢力이 크게 약화되고 王權이 强化될 수 있었다. 또한 光宗은 스스로 皇帝라 칭하고, 開京을 皇都, 西京을 西都라 칭했으며, 光德·峻豊이라는 독자적 年號를 使用하였다. 다만 高麗 國王들은 스스로를 皇帝라 칭했으나 光宗처럼 對內외에 露骨的으로 皇帝를 칭하지는 않았다. 이것은 高麗 外王內帝를 쓰는 國家였기 때문에 비롯된 것이다. |
| | 光宗의 改革은 景宗 때의 經濟 改編으로 이어져 中央 官僚들의 經濟적 基盤을 保障하기 위한 田柴科 制度가 實施되었고, 成宗 때의 支配 體制 整備로 이어져 統治 體制가 確立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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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政治 == | | == 政治 == |
2023年11月26日(日)01時09分 版
高麗는 918年 王建이 卽位한 以後, 1392年 李成桂에 依해 滅亡하기까지 韓半島에 存在하던 國家이다. 또한 高麗는 外王內帝를 가장 積極的으로 한 國家이며 高麗의 君主는 生前에는 皇帝라 稱했으나 崩御 以後 諡號는 大王으로 올렸다.
歷史
高麗의 成立과 後三國 統一
10世紀 初 新羅에서는 王位爭奪戰이 頻繁히發生하여 政治가 混亂해졌고 全國 各地에서는 租稅受取에 反撥하여 農民 蜂起가 發生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地方 호족들이 新羅 朝廷으로부터 獨立하여 各自 自身의 勢力을 키웠는데 그 중에서도 新羅 진골 王族이었던 弓裔와 新羅의 將帥였던 甄萱이 강한 勢力을 構築하였다. 甄萱이 摩震 後百濟를 자칭했고, 곧 弓裔가 泰封을 세웠다. 이로써 新羅, 後高句麗, 後百濟가 서로 대립하게 되었는데, 이 時期를 後三國 시대라 부른다.
以後 弓裔가 失政을 거듭하고, 民心을 잃게 되자 이에 918年 統一新羅 松嶽 地方의 有望한 新羅 豪族이었던 王建은 弓裔를 몰아내고 임금의 자리에 올라 새로운 나라의 建國을 宣布하게 되는데 국호를 高麗, 연호를 天授라고 하고, 919年 松嶽(開城)으로 都邑을 옮겼다. 그 側近 혹은 本人이 高句麗의 血統이었기 때문에 국호로 高麗를 使用하여 高句麗의 後孫을 자처하는 데에는 王建과 弓裔가 다름이 없었다. 한편 926年 渤海가 요나라의 侵略을 받고 滅亡하자, 渤海의 王族을 비롯한 流民을 받아들여 勢力을 키웠다. 이는 王建의 政治적·軍事적 基盤을 確固히 하였을 뿐만 아니라, 高句麗에 대한 繼承意識을 確固히하면서 新羅 豪族으로서의 性格 역시 뚜렷이 나타내 주었다. 또한 對外 政策에서도 弓裔와는 달리 親新羅 政策을 썼다. 이는 新羅의 傳統과 權威의 繼承자가 되려고 한 것이었다. 王建은 新羅를 保護하기 危害 金城 北 50里의 땅에 神光鎭을 設置하여 高麗의 軍事를 駐屯하게 하였다.
結局 新羅 敬順王은 新羅의 高麗 歸順을 決定(결정)했고, 936年에 新羅 軍事와 함께 後百濟를 敗亡시킴으로써 高麗는 後三國을 統一하였다.
光宗의 改革 政治
太祖의 뒤를 이은 惠宗과 定宗 때에는 皇權이 不安定하여 皇族들과 外戚들 사이에 繼承 다툼이 일어났다. 이러한 王權의 不安定은 太祖가 後三國을 統一하는 過程에서 新羅 豪族 勢力을 糾合하기 위하여 取下였던 婚姻 政策 때문에 나타난 副作用이었다.
이런 狀況에서 卽位한 光宗은 皇權의 安定과 中央 集權 體制를 確立하기 위한 政策을 推進하였다. 光宗은 奴婢按檢法(956年)을 實施하여 豪族들의 세력을 弱化시키고 國家의 收入 基盤을 擴大하였다. 이로써 功臣이나 豪族의 經濟적·軍事적 基盤이 弱化된 반면, 奴婢들은 良民이 되어 租稅와 賦役의 義務를 지게 되었으므로 國家의 財政 基盤과 皇權이 安定되었다. 勿論 이는 高麗 貴族들에 依해 限界가 있긴 하였다. 崔承老의 奴婢還遷法은 奴婢安檢法으로 풀려난 자들을 道路 奴婢로 만들었다.
957年 後周에서 歸化한 雙冀가 新羅의 讀書三品科를 繼承·擴張하자고 建議하였고, 958年 光宗은 문예와 儒敎 經典을 試驗하여 문반 管理를 選拔하는 過去 制度를 施行하였다. 過去는 功臣의 子弟를 優先적으로 登用하던 종래의 管理 등용 制度를 抑制하고, 새로운 管理 選拔 基準을 磨鍊한 것이다. 이를 통하여 光宗은 儒學을 익힌 신진 人士를 登用하여 新舊 勢力의 交替를 圖謀하였다. 또한 이것은 文治主義로 轉換한 標示로, 무신 大臣에 文臣을 管理로 登用하려는 것이다. 文臣을 登用하는 基準은 儒敎에 두었다. 따라서 科擧制度의 實施는 王權의 强化를 위한 새로운 官僚 體制 設定의 基礎 作業이었다. 이것을 安定시키기 위하여 磨鍊한 것이 百官의 公服 制定이었다. 복색을 制定함으로써 王權 中心으로 貴族층을 安定시키고 支配층의 位階 秩序를 確立하게 된다.
一連의 改革을 통하여 自身감을 갖게 된 光宗은 本格的으로 功臣과 豪族 勢力을 除去하여 王權을 强化하였다. 이로써 王朝 成立 初期의 功臣과 豪族 勢力이 크게 약화되고 王權이 强化될 수 있었다. 또한 光宗은 스스로 皇帝라 칭하고, 開京을 皇都, 西京을 西都라 칭했으며, 光德·峻豊이라는 독자적 年號를 使用하였다. 다만 高麗 國王들은 스스로를 皇帝라 칭했으나 光宗처럼 對內외에 露骨的으로 皇帝를 칭하지는 않았다. 이것은 高麗 外王內帝를 쓰는 國家였기 때문에 비롯된 것이다.
光宗의 改革은 景宗 때의 經濟 改編으로 이어져 中央 官僚들의 經濟적 基盤을 保障하기 위한 田柴科 制度가 實施되었고, 成宗 때의 支配 體制 整備로 이어져 統治 體制가 確立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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