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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文化公報部 傘下 國立映像製作所(現 文化體育觀光部 韓國政策放送員)에서 1952年 2月부터 1994年 12月까지 35mm 필름으로 製作한 劇場 上映用 뉴스. 全國의 모든 劇場에서 義務 上映해야 했다. 필름은 1週에 한 番씩 바뀌었으며, 總 2040回가 製作되었다. | | 文化公報部 傘下 國立映像製作所(現 文化體育觀光部 韓國政策放送員)에서 1952年 2月부터 1994年 12月까지 35mm 필름으로 製作한 劇場 上映用 뉴스. 全國의 모든 劇場에서 義務 上映해야 했다. 필름은 1週에 한 番씩 바뀌었으며, 總 2040回가 製作되었다. |
| == 特徵 == | | == 特徵 == |
| 大韓뉴스는 라디오 뉴스보다는 늦게 나왔지만 當時 텔레비전은커녕 라디오의 普及率도 相當히 낮았고, 新聞이나 雜誌 等 活字 媒體의 境遇 文盲率이 相當히 높아 제대로 된 뉴스를 傳한다는 것이 如意치 않은 狀況이었기 때문에 나라 안팎의 動向을 大衆에게 效率的으로 알리기 위한 目的으로 製作되었다. 뉴스映 畫 는 19世紀 末에 製作되기 始作했고, 正規製作은 1909年 프랑스 파테사에서 製作한것이 始初였고, 以後 全世界的으로 製作되기 始作했다. 이 當時에는 唯一하게 映像으로 뉴스를 椄할수있던 手段이었기 때문에 텔레비전이 大衆化되기 以前에는 人氣가 높았고, 世界 各國의 TV放送社들도 放送 初期에는 映 畫 뉴스를 가져다가 TV로 放送하였다. | | 大韓뉴스는 라디오 뉴스보다는 늦게 나왔지만 當時 텔레비전은커녕 라디오의 普及率도 相當히 낮았고, 新聞이나 雜誌 等 活字 媒體의 境遇 文盲率이 相當히 높아 제대로 된 뉴스를 傳한다는 것이 如意치 않은 狀況이었기 때문에 나라 안팎의 動向을 大衆에게 效率的으로 알리기 위한 目的으로 製作되었다. [[ 뉴스 映 畵]] 는 19世紀 末에 製作되기 始作했고, 正規製作은 1909年 [[ 프랑스]] 파테사에서 製作한것이 始初였고, 以後 全世界的으로 製作되기 始作했다. 이 當時에는 唯一하게 映像으로 뉴스를 椄할수있던 手段이었기 때문에 텔레비전이 大衆化되기 以前에는 人氣가 높았고, 世界 各國의 TV放送社들도 放送 初期에는 映 畵 뉴스를 가져다가 TV로 放送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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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大韓뉴스처럼 國家에서 記錄映 畫 를 製作하는 것은 나치 獨逸 같은 軍國主義 國家에서 가장 活潑했다. 第2次 世界大戰 當時 西歐圈에서는 위와 같은 理由로 記錄映 畫 를 많이 만들어 上映했다. | | 大韓뉴스처럼 國家에서 記錄映 畵 를 製作하는 것은 나치 獨逸 같은 軍國主義 國家에서 가장 活潑했다. 第2次 世界大戰 當時 西歐圈에서는 위와 같은 理由로 記錄映 畵 를 많이 만들어 上映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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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치 獨逸의 '獨逸 週刊 評論'(Die deutsche Wochenschau)李 有名하며[3] 美國은 할리우드의 인프라를 利用해 많은 記錄映 畫 를 찍어냈다. 네덜란드에서도 '폴리魂 주르날'(Polygoon Journaal)이라는 이름으로 1919年부터 1987年까지 上映한 바 있으며[4] 쿠바에서도 쿠바映 畫 藝術産業硏究所 主導로 'Noticiero ICAIC Latinoamericano'를 1959年부터 1990年까지 製作했다. | | 나치 獨逸의 '獨逸 週刊 評論'(Die deutsche Wochenschau)李 有名하며[3] 美國은 할리우드의 인프라를 利用해 많은 記錄映 畵 를 찍어냈다. 네덜란드에서도 '폴리魂 주르날'(Polygoon Journaal)이라는 이름으로 1919年부터 1987年까지 上映한 바 있으며[4] 쿠바에서도 쿠바映 畵 藝術産業硏究所 主導로 'Noticiero ICAIC Latinoamericano'를 1959年부터 1990年까지 製作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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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臺灣에서도 大韓뉴스와 비슷한 時期에 [[中華民國新聞]]이라는 뉴스 映畫를 製作했고, 中國에서는 新聞間보라는 名稱으로 [[新聞映 畫(祖國新貌)]]를 製作했다. | | 臺灣에서도 大韓뉴스와 비슷한 時期에 [[中華民國新聞]]이라는 뉴스 映畫를 製作했고, 中國에서는 新聞間보라는 名稱으로 [[新聞映 畵(祖國新貌)]]를 製作했 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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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앞서 말한 獨逸 週間 뉴스가 樞軸國 一員이었던 [[日本帝國]]에도 影響을 주었고, 그로 인해 1940年부터 日本도 國政 記錄 映畵를 製作해 上映하기 始作하는데, 그게 '[[日本 뉴스]]'(日本ニユース)다. 보러가기추축국 親舊 나치 消息도 나오고 티거 電車도 나온다 太平洋 戰爭이 끝난 後 한 次例 改編을 거쳐 1952年까지 나왔고, 以後에 아사히신문과 提携해서 아사히 뉴스로 名稱을 바꿨다가, 1976年에 提携 關係가 끝나자 다시 日本 뉴스로 復歸했고 1992年까지 繼續 製作되었다. 1990年代 初盤 NHK BS1에서 가끔 映像 實錄 비스무리하게 時間 때우기 用途로 틀어주는 境遇가 있었다. 또한 日本에서는 日本 뉴스 以外에도 다양한 뉴스 映畵가 製作되었는데, 1997年까지 製作된 요미우리 國際뉴스와 1992年까지 製作된 마이니치 뉴스가 代表的이고, 土에이도 아사히 新聞과 손을 잡고 뉴스 映畵를 製作한 적이 있었다. 日本에서 TV가 大衆化된 時期가 1960年代이고, 리포팅 形式의 뉴스 프로그램이 完全히 定着된 게 1970年代임을 勘案하면 꽤나 오래 製作된 셈이 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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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서 말한 獨逸 週間 뉴스가 樞軸國 一員이었던 [[日本帝國]]에도 影響을 주었고, 그로 인해 1940年부터 日本도 國政 記錄 映畫를 製作해 上映하기 始作하는데, 그게 '[[日本 뉴스]]'(日本ニユース)다. 보러가기추축국 親舊 나치 消息도 나오고 티거 電車도 나온다 太平洋 戰爭이 끝난 後 한 次例 改編을 거쳐 1952年까지 나왔고, 以後에 아사히신문과 提携해서 아사히 뉴스로 名稱을 바꿨다가, 1976年에 提携 關係가 끝나자 다시 日本 뉴스로 復歸했고 1992年까지 繼續 製作되었다. 1990年代 初盤 NHK BS1에서 가끔 映像 實錄 비스무리하게 時間 때우기 用途로 틀어주는 境遇가 있었다. 또한 日本에서는 日本 뉴스 以外에도 다양한 뉴스 映畫가 製作되었는데, 1997年까지 製作된 요미우리 國際뉴스와 1992年까지 製作된 마이니치 뉴스가 代表的이고, 土에이도 아사히 新聞과 손을 잡고 뉴스 映畫를 製作한 적이 있었다. 日本에서 TV가 大衆化된 時期가 1960年代이고, 리포팅 形式의 뉴스 프로그램이 完全히 定着된 게 1970年代임을 勘案하면 꽤나 오래 製作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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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歷史 == | | == 歷史 == |
| === 誕生과 上映 === | | === 誕生과 上映 === |
槪要
文化公報部 傘下 國立映像製作所(現 文化體育觀光部 韓國政策放送員)에서 1952年 2月부터 1994年 12月까지 35mm 필름으로 製作한 劇場 上映用 뉴스. 全國의 모든 劇場에서 義務 上映해야 했다. 필름은 1週에 한 番씩 바뀌었으며, 總 2040回가 製作되었다.
特徵
大韓뉴스는 라디오 뉴스보다는 늦게 나왔지만 當時 텔레비전은커녕 라디오의 普及率도 相當히 낮았고, 新聞이나 雜誌 等 活字 媒體의 境遇 文盲率이 相當히 높아 제대로 된 뉴스를 傳한다는 것이 如意치 않은 狀況이었기 때문에 나라 안팎의 動向을 大衆에게 效率的으로 알리기 위한 目的으로 製作되었다. 뉴스 映畵는 19世紀 末에 製作되기 始作했고, 正規製作은 1909年 프랑스 파테사에서 製作한것이 始初였고, 以後 全世界的으로 製作되기 始作했다. 이 當時에는 唯一하게 映像으로 뉴스를 椄할수있던 手段이었기 때문에 텔레비전이 大衆化되기 以前에는 人氣가 높았고, 世界 各國의 TV放送社들도 放送 初期에는 映畵뉴스를 가져다가 TV로 放送하였다.
大韓뉴스처럼 國家에서 記錄映畵를 製作하는 것은 나치 獨逸 같은 軍國主義 國家에서 가장 活潑했다. 第2次 世界大戰 當時 西歐圈에서는 위와 같은 理由로 記錄映畵를 많이 만들어 上映했다.
나치 獨逸의 '獨逸 週刊 評論'(Die deutsche Wochenschau)李 有名하며[3] 美國은 할리우드의 인프라를 利用해 많은 記錄映畵를 찍어냈다. 네덜란드에서도 '폴리魂 주르날'(Polygoon Journaal)이라는 이름으로 1919年부터 1987年까지 上映한 바 있으며[4] 쿠바에서도 쿠바映畵藝術産業硏究所 主導로 'Noticiero ICAIC Latinoamericano'를 1959年부터 1990年까지 製作했다.
臺灣에서도 大韓뉴스와 비슷한 時期에 中華民國新聞이라는 뉴스 映畫를 製作했고, 中國에서는 新聞間보라는 名稱으로 新聞映畵(祖國新貌)를 製作했다.
앞서 말한 獨逸 週間 뉴스가 樞軸國 一員이었던 日本帝國에도 影響을 주었고, 그로 인해 1940年부터 日本도 國政 記錄 映畵를 製作해 上映하기 始作하는데, 그게 '日本 뉴스'(日本ニユース)다. 보러가기추축국 親舊 나치 消息도 나오고 티거 電車도 나온다 太平洋 戰爭이 끝난 後 한 次例 改編을 거쳐 1952年까지 나왔고, 以後에 아사히신문과 提携해서 아사히 뉴스로 名稱을 바꿨다가, 1976年에 提携 關係가 끝나자 다시 日本 뉴스로 復歸했고 1992年까지 繼續 製作되었다. 1990年代 初盤 NHK BS1에서 가끔 映像 實錄 비스무리하게 時間 때우기 用途로 틀어주는 境遇가 있었다. 또한 日本에서는 日本 뉴스 以外에도 다양한 뉴스 映畵가 製作되었는데, 1997年까지 製作된 요미우리 國際뉴스와 1992年까지 製作된 마이니치 뉴스가 代表的이고, 土에이도 아사히 新聞과 손을 잡고 뉴스 映畵를 製作한 적이 있었다. 日本에서 TV가 大衆化된 時期가 1960年代이고, 리포팅 形式의 뉴스 프로그램이 完全히 定着된 게 1970年代임을 勘案하면 꽤나 오래 製作된 셈이다.
歷史
誕生과 上映
1940年 '日本뉴스'가 始作되면서 朝鮮에서도 定期的인 뉴스映畫 製作이 試圖되었다. 1941年 朝鮮文化映畫協會에서 '朝鮮뉴스'를 製作하였으며, 1942年 朝鮮의 모든 映畫會社가 朝鮮映畫製作株式會社로 統廢合되면서 '朝鮮時報'로 이름을 바꿔 月 1回 發行하기 始作했다. 그러나 月 1回라는 製作 週期는 뉴스로서는 速報性이 떨어지고 記錄映畫로서도 映像技術이 粗雜하는 等 評判이 좋지 않았다. 結局 1944年 以後로는 뉴스映畫의 供給處는 '日本뉴스'로 集約되었다. 한便, 1943年 9月 22日 發行 朝鮮時報 第11步가 러시아 國立 아카이브 고스필모폰드를 통해 映像이 發掘되어 남아 있다.조선시보 第11報(1943)
光復 以後 美軍政廳 公報部 映畫科에서는 1946年 1月부터 1947年 末까지 總 27號의 '試補'[6]를 製作하였다. 美軍政廳 公報部의 '試補'는 美國國立文書保管所(NARA)가 所藏한 4篇[7]의 映像이 남아 있는데 서울 中央廳舍 太極旗 揭揚式, 美國 陸軍長官 로버트 패터슨 訪韓, 微笑 1次 正式會談, 南朝鮮過渡立法議院 開院式 等 歷史의 重要한 場面을 映像 記錄으로 남겼다. '試補'는 1948年 1月부터 '朝鮮전진보'로 除名을 바꾸어 製作되었고 1948年 大韓民國 政府가 樹立된 해 11月 4日에 公報處 公報局 映畫科가 發足되어 그 傘下에 들어가면서 '大寒전진보'로 改名되어, 黑白필름으로 月 1回 製作되었다. 以後 6.25戰爭이 勃發하면서 製作이 中斷되었다.
參考로 北韓에서도 北朝鮮國立映畫撮影所에서 1948年 3月부터 '朝鮮時報'란 이름으로 뉴스映畫를 製作하였다.
뉴스 製作은 避難政府가 있던 釜山에서 1952年 1月 다시 始作되었다. 이때 다시 題目을 고쳐 “大寒 뉴-스”라고 하였는데, 16mm 필름으로 月 2-3回 程度 不定期的으로 製作되었다. '大韓 뉴-스'는 이동영死斑이 地方을 돌면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 上映되었는데 안타깝게도 이 時期 製作된 1號부터 21號까지의 原版은 서울 還都 過程에서 紛失되고 말았다.[11] 公式的으로 남아있는 記錄은 1953年 6月 23日 22號부터다. 1954年(48號)부터는 外來語 表記法 改正으로 인해 이름을 '大韓늬우스'로 바꾸는데, 約 6年밖에 使用되지 않았음에도 그 쌈마이함으로 인해 現在까지도 膾炙되는 이름이기도 하다.
以後 1957年 4月부터 本格的으로 한 週마다 製作되기 始作하였고, 1960年(275號)부터 '大寒뉴우스'라는 이름으로 製作되다 1978年(1214號) 以後 '大韓뉴스'라는 이름으로 定着되었다. 1980年 3月(1279號)에는 '카메라 旬報'로 이름을 바꾸고 製作 間隔도 月 2回로 줄어들었지만 3個月(1285號)만에 元來대로 還元되었다.
1972年부터 映畫의 컬러化 時代에 따라 컬러 上映을 順次的으로 導入하기 始作하여 1977年 8月(1145號)부터는 컬러로 完全히 轉換하였다. 大韓뉴스 第 1008號 불操心처럼 黑白과 컬러가 섞여있는 뉴스도 있다.[13] 參考로 最初의 컬러뉴스는 1972年 12月 27日 912號로, 第8代 大統領 選擧를 통해 當選된 朴正熙大統領 就任式과 임진각의 建設 消息을 다루고 있었다. #
一部는 애니메이션으로 이루어진 大韓뉴스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서울 올림픽 즈음에는 호돌이가 나와 公益廣告를 하는 大韓뉴스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當時 大韓뉴스 中 一部分은 公益廣告協議會에 製作한 公益廣告가 들어간 것도 있었다.
海外 消息도 大韓뉴스를 통해 많이 報道되었다. 프라하의 봄, 나치 아돌프 아이히만 裁判, 베트남 戰爭 勃發, JFK 被擊 事件, 베를린 對峙, 蔣介石 死亡, 베트남 쿠데타, 美國 誘引로켓 發射 成功, 아폴로 11號, 도쿄 찌르기 事件, 東獨 反소봉기 等. 1958年度 뉴스의 國外 消息에서 "유니버살 映畫社 提供"이라는 字幕이 나오는데, 映像을 自體的으로 撮影할 事情이 안 되다보니 유니버설 픽처스가 製作한 뉴스 映畫를 輸入한 것.
獨裁 政府 宣傳手段이라는 批判을 많이 받았다. 製作 主體가 主體다 보니 獨裁政權에서는 그 喇叭手 노릇을 할 수 밖에 없었다. 例를 들면 5.18 民主化運動 以後에 내놓은 安定만이 살길에서는 5.18 民主化運動을 不純分子들이 조장한 暴動으로 報道했고, 活氣 되찾은 光州는 '暴動' 끝난 後 光州의 평화로운 모습을 演出했다.
또한 전두환 新軍部 執權 時期에는 恒常 '大統領 同情'이란 題目을 無條件 첫 머리로 내보내야 했다.
廢止, 그리고 TV 메인뉴스化
TV放送이 1956年度에 始作되었고 TV뉴스도 같은해 부터 編成되吳起는 했지만 필름과 비디오 테이프의 價格이 비싸다보니 1950~1960年代의 境遇 一部 프로그램이나 뉴스 필름을 除外하면 남아있는 것이 없고, 1970年代와 80年代에도 放送社에서 테이프를 돌려쓰기 慣行[14]李 남아있었기 때문에 當代의 時代相을 엿볼수있는 TV프로그램들이 正常的으로 保存되지 못했다.
하지만 大韓뉴스는 事實上 政府 施策의 宣傳 機關이다 보니 豐富한 豫算으로 資料를 體系的으로 保存해왔기 때문에 그 當時의 時代相을 쉽게 알기 위해서는 事實上 大韓뉴스밖에 길이 없는 셈이었다. 디지털化度 이미 2000年代를 거쳐 모두 完了되었기 때문에 KBS나 MBC, 그리고 동양방송의 資料를 가지고 있는 JTBC처럼 歷史가 오래된 放送局들의 立場에서도 찾기 어려운 1950年代~1970年代 뉴스 資料를 찾는 것 보다는 그냥 大韓뉴스 資料를 빌려서 쓰는 게 더 빠르고 便하다. 特히 1990年代에 個國해서 相對的으로 放送 資料가 不足한 SBS, YTN의 境遇는 어쩔 수 없이 大韓뉴스를 쓸 수밖에 없으며, 한 때 YTN에서 放映한 '오늘의 歷史 - 歷史 속 오늘'에서도 大韓뉴스 資料를 使用했다.
特히 理論的으로 4K UHD級 畫質로 復元할 수 있는 映畫 필름으로 撮影했다보니 放送社 카메라로 찍은 映像보다 畫質이 훨씬 좋다. 이 때문에 大韓뉴스가 廢止된 1994年부터 HD 放送이 本格化되던 2000年代 中後半까지의 資料畵面 畫質이 더 좋지 않은 境遇가 많다. 特히 1990年代 資料는 放送社들이 SD로만 撮影해서 畫質이 좋지 않다.
慇懃히 밀덕후들을 즐겁게 해주는 場面이 많다. 이런 거나 이런 거. '1435號-奇襲挑發 防禦' 映像에서 空軍의 An-2街 對抗軍 裝備로 登場하고, '第 1253號-首都圈 民防衛 訓鍊'에서는 特戰司 兵力이 MAC-10 機關短銃과 CAR-15로 묶여 불리는 短縮型 AR-15系列 銃器를 使用하는 場面이 登場한다. 베트남 派兵 當時 韓國으로 密搬入된 未濟 軍需品의 一部였던 CAR-15들의 境遇에는, 4共和國 時節부터 警護室과 警護室의 統制를 받는 一部 警護部隊에만 普及되었으며 1980年代 初 K1 機關短銃의 普及으로 一線에서 물러나게 된다.
鐵道 同好人들도 여기서 옛날 資料들을 찾아볼 수 있다. 例를 들어 水仁線 狹軌列車 時節이나 서울1號線 開通 뉴스 等. 鐵道博物館 얘기도 나오며 中央線, 太白線, 嶺東線 電鐵化 竣工, 慶北線 開通 等 鐵道 關聯 遺物들도 찾아볼 수 있다.
- ↑ '大韓뉴스' 第1號 基準이다. 美軍政廳 公報部 '時報' 基準으로는 1946年 1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