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文書: == 槪要 == Toadyism 또는 Flunkyism 事大主義는 큰 나라(大)를 섬기는(事) 思想을 意味 한다. 事大主義와 慕華主義를 合쳐 事大慕華라고도 한다. == 意見 == === 擁護論 === 事實 이 用語는 西歐의 植民主義 프레임에 東아시아 外交關係를 꿰어 맞추면서 "한 國家가 自律性을 抛棄하고 强한 國家에 服從하거나 盲目的으로 追從하려는 思想 또는 外交方針"을 槪念化하기 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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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은 것이 큰 것을 섬긴다는 '事大'라는 槪念은 一旦 儒敎의 基本 觀念 中 하나였다는 點을 理解할 必要가 있다. '子息은 父母를 섬기고, 弟子는 스승을 섬기고, 臣下는 임금을 섬기고, 지어미는 지아비를 섬기고, 나이 어린 사람은 나이 많은 사람을 섬기고, 작은 나라는 큰 나라를 섬겨야 한다'는 생각은 朝鮮時代 儒敎的 觀點에서 보면 너무도 當然한 것이었다. 따지고 보면 忠과 孝라는 것도 작은 것(臣下, 子息)李 큰 것(왕, 父母)을 섬긴다는 事大의 論理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때문에 '큰 나라에 事大를 하지 않는 것'은 不孝, 不忠과 다름 없게 되는 것이다.
 작은 것이 큰 것을 섬긴다는 '事大'라는 槪念은 一旦 儒敎의 基本 觀念 中 하나였다는 點을 理解할 必要가 있다. '子息은 父母를 섬기고, 弟子는 스승을 섬기고, 臣下는 임금을 섬기고, 지어미는 지아비를 섬기고, 나이 어린 사람은 나이 많은 사람을 섬기고, 작은 나라는 큰 나라를 섬겨야 한다'는 생각은 朝鮮時代 儒敎的 觀點에서 보면 너무도 當然한 것이었다. 따지고 보면 忠과 孝라는 것도 작은 것(臣下, 子息)李 큰 것(왕, 父母)을 섬긴다는 事大의 論理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때문에 '큰 나라에 事大를 하지 않는 것'은 不孝, 不忠과 다름 없게 되는 것이다.
== 事例 ==
=== 高句麗 ===
高句麗-水 戰爭을 이끈 嬰陽王은 隋文帝에게 自身을 '搖動이라는 똥땅에 있는 臣下 아무개(遼東糞土臣某: 搖動墳土申某)'라 하며 先制 侵攻한 것을 謝過하자 隋文帝는 憤怒를 풀고 爵位를 回復하여 주었으며 마찬가지로 麗水戰爭에서 活躍한 영류왕은 戰爭은 勝利했음에도 高句麗 領土 한복판에서 벌어진 亂離통에 對한 厭症을 느꼈는지 被害 回復 期間을 갖기 위해 당태종에게 和親 政策을 펼쳤다.
=== 百濟 ===
高句麗에 依해 首都 慰禮城이 守勢에 몰렸을 때 蓋鹵王이 北魏에 援助를 要請하는 國書를 보냈는데 그 內容이 相當히 屈辱的인데 백제의 公主를 後宮의 淸掃夫로, 子弟들을 馬廏間지기로 보내겠다는 內容이다.
백제 國王은 代代로 南朝에 朝貢을 바치고 冊封을 받았다. 一例로 武寧王은 永同大將軍이라는 稱號를 받았는데 中國에서 받은 이 稱號를 武寧王陵 誌石에도 表記할 程度로 매우 자랑스러워 한 것으로 보인다.
=== 新羅 ===
統一 以前 新羅는 官服의 樣式을 바꾸어 黨과 같이 하였으며, 그間 行해왔던 新羅 固有의 年號를 廢止하고 黨의 年號를 使用하도록 했다. 이는 新羅가 唐나라 中心의 天下 秩序에 歸屬하겠다는 것을 公式的으로 表明한 것이었다.
羅唐戰爭은 事大主義란 것의 矛盾이 가장 크게 드러난 事件 中 하나다. 新羅가 搖動과 熊津都督府의 唐나라 領域을 먼저 攻擊하면서 7年間의 戰爭이 始作되었는데, 정작 戰爭터에서는 싸우는 渦中에 中國에는 謝罪社를 보내는 等 形式上의 事大는 繼續되었다. 卽 '攻擊해서 罪悚했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정작 하던 攻擊은 멈추지 않고 繼續하고 있는 셈. 이런 謝罪社는 唐나라가 誤判하게 하는 時間벌기용이자 唐나라가 戰爭을 그만두도록 名分을 쌓아주는 것이었고 結局 몇 次例 決定的 攻擊을 新羅가 막아낸 以後 곧 戰爭이 끝나고 머지않아 國交가 再開되었다.
=== 渤海 ===
唐나라와 朝貢-冊封 關係를 樹立했으며 黨의 長安城을 본따 首都 上京용천부를 區劃했고 中央 組織 亦是 唐나라式으로 整備했다.
=== 高麗 ===
‘權’은 臨時라는 뜻이고 ‘知’는 맡는다는 뜻이므로, 權知國事는 "아직 冊封을 받지 못한 期間 동안에 臨時로 나랏일을 맡아 다스린다"라는 뜻을 가진 稱號로서, 權署國事라고도 한다. 高麗는 太祖 王建의 王朝 創建 以後 王이 卽位하면 中國에 이를 알리어 承認을 받아야만 王이라고 稱할 수 있었다. 高麗 太祖 王建은 權知高麗國王事라는 稱號를 記錄上 最初로 使用하였고 以後 이러한 傳統은 後代의 高麗王들에게까지 一種의 慣例로서 繼續 이어지게 되었다.
光宗은 年號를 光德, 峻豊으로 삼고 稱帝建元 하였지만 宋나라와 거란이 激烈하게 抗議하자 結局 뜻을 거둔 채 稱帝建元을 取消하였고 宋나라를 千자국으로 認定하고 宋의 年號인 乾德을 使用하였다.
成宗은 994年 6月, 宋나라에 '高麗는 眞心으로는 송을 따르고 있으며 거란을 憎惡한다'는 國書를 보냈다. 單純히 外交的 有不利 때문뿐만 아니라 成宗은 重빠로서 儒敎의 思想을 따르고 中國의 制度를 들여오길 좋아했다.
穆宗이 997年에 吏部侍郞 主人邵를 宋에 派遣하여 高麗가 中和를 思慕하고 있으나 오랑캐 거란에 막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는 國書를 보냈다.
穆宗이 西京의 이름을 鎬京으로 바꾸었다. 鎬은 周나라의 首都였다. 以後에 好景은 다시 西京으로 이름이 돌아오나 光宗이 바꿨던 이름인 西都와 같이 西京의 別稱으로 쓰이게 되었다. 人種 時期의 大花宮 稚魚에서도 서경이 '鎬京'으로 나오고 毅宗이 人種에게 만들어 올린 玉冊에도 妙淸의 亂이 '鎬京之亂'이라 나온다.
1125年 금태종은 高麗에서 온 國書를 接受하기를 拒否했는데, 그 理由는 國書의 棲息이 表가 아니고 또 高麗 王이 臣을 稱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金나라는 考慮에 對해 遼나라를 섬겼던 것처럼 金나라를 섬기라고 해 稱臣事大의 關係를 要求했는데, 이것을 旣定事實化하려는 것이었다. 高麗는 이에 對해 한동안 아무런 措置를 取하지 못하고 있다가 이듬해 1126年 朝廷 會議에서 金나라와의 關係 設定 問題를 協議했다. 大多數는 女眞族이 오랑캐이므로 相對할 수 없다고 했으나 實權者 李資謙과 여진 征伐에 參與했던 拓俊京 等이 "金나라가 예전에는 작은 나라로써 高麗와 遼나라를 섬겼으나 只今은 强大해져 遼나라와 北宋을 멸망시켜 政治的, 軍事的 强國이 되었고, 우리와 接境해 諸般 情勢가 私貸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또한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은 先王의 法도이니 마땅히 먼저 使臣을 보내 例를 지키는 것이 좋다"고 했고 人種은 이 主張을 採擇했다. 이어 4月 人種은 鄭應文 等을 金나라에 보내 自身을 臣이라 해 事大의 例로 國交를 맺게 되었다.
武臣政權 期間 中 임연이 쿠데타를 일으켜 김준을 죽이자 事大主義的이었던 元宗은 前任 執權者인 김준 때부터 武臣들에게 人氣가 좋았던 안경공 窓에게 선양을 하였다. 그리고 몽골帝國에는 原從이 病 때문에 讓位했다 하였다. 하지만 몽골에 있던 世子가 쿠빌라이 칸에게 알리자 몽골에 事大的이었던 原種을 支持하던 몽골이 反撥하였고 世子가 몽골軍까지 끌고 歸國하자 林衍은 結局 힘에 屈服하여 다시 元宗을 王位에 복귀시켰다. 그리고 復位된 원종대에 開京으로 還都하게 된다.
=== 朝鮮 ===
李成桂가 高麗 王位를 簒奪하고 나라를 세우자 明나라는 李成桂를 권지고려국사라며 王으로 認定하지 않는다. 開國勢力은 明나라 皇帝에게 王으로 任命되기 위해 努力하며 箕子朝鮮을 잇는다는 意味로 朝鮮이란 國名을 提示하여 允許받고 朝鮮을 세우며 以後 明나라에 事大한다.
淸州 韓氏, 利川 徐氏, 太原 鮮于氏, 행주 奇氏는 記者와 箕子朝鮮의 王들이 祖上이라며 자랑스러워 했다.
太宗이 諸侯國의 制度로 自體的인 諸侯를 冊封하는것은 禮法上 맞지 않다고 한 以後 朝鮮은 '皇帝'에게 冊封 받은 作位인 朝鮮王 王爵하나만을 除外하고 中國 君主가 아닌 韓國 君主가 自體的으로 임명하는 一切의 王爵과 五等爵 爵位를 없애 버린다.
太宗은 "조금이라도 事大의 禮를 잃어서는 안되며, 마땅히 王보다 높여 至誠으로 天子의 使臣을 섬겨야 한다."는 遺訓을 내리며 '恩惠를 맞이 한다'는 意味의 迎恩門을 세웠다. 또한 바로 옆에는 '中和를 欽慕한다'는 意味의 使臣 迎賓館이었던 慕華館도 있었다. 이 둘은 中國에서 皇帝의 使臣이 올 때 거처가는 곳이었으며 皇帝의 臣下였던 諸侯國 朝鮮의 王은 이곳까지 直接 마중을 나가서 使臣을 맞이 했다. 이때 當然히 朝鮮王은 天子의 臣下로서 中國 使臣과 서로 맞절을 해야 했다.
宣祖는 光海君은 明나라 皇帝에게 世子로 冊封을 받지 않았다는 것을 가지고 光海君을 排斥하는 名分으로 使用했다.
壬辰倭亂과 丁酉再亂이라는 亡國의 危機를 明나라의 萬曆帝가 高麗天子 또는 朝鮮皇帝라는 비아냥까지 들어가며 22萬 大軍과 쌀 100萬섬이라는 國庫金에다 內帑金까지 消耗해서 엄청난 物量을 쏟아부으며 朝鮮을 起死回生 시키며 살려주자 朝鮮에는 再造之恩이라는 義理의 觀念이 피어난다. 以後 淸나라가 强해져서 明나라 路線이 外交的으로 不利해져도 盲目的으로 오직 明나라만 따라야 한다는 主張이 得勢하였고 名이 請에 亡하자 恩惠를 갚자는 北伐論度 일어난다. 民間에서는 丙子胡亂 以後 淸나라에 社對하여 淸國皇帝를 上國으로 모시지만 眞正한 天子는 오직 明나라 皇帝라며 마지막 明나라 皇帝였던 崇禎帝의 年號를 使用하고 碑石에는 有明朝鮮國이라며 明나라에 있는 造船國이라는 文句를 使用하며 萬曆帝를 追慕하는 大報壇과 萬東廟를 세우며 信仰에 가까운 明나라 崇拜意識이 생겨난다.
世界 最初의 兒童用 敎科書인 童蒙先習에는 '中國人이 작은 中華라고 稱讚하니 이 어찌 記者가 남긴 敎化가 아니겠는가? 아! 어린이들은 마땅히 이 것을 보고 感動하여 奮發해야 한다.'라는 대목이 있다.
開化期에 西洋 여러나라의 異樣船들이 朝鮮에 通商을 하자 請하면 朝鮮은 恒常 拒否하였는데 그 理由는 朝鮮은 淸나라의 屬國이므로 自體的인 外交 決定權의 權限이 없어서 淸나라의 許諾이 必要하다는 것이 外交上의 公式答辯이었다.

2024年5月31日(金)15時01分 基準 最新版

槪要(개요)[編輯]

Toadyism 또는 Flunkyism

事大主義(사대주의)는 큰 나라(())를 섬기는(()) 思想(사상)意味(의미) 한다. 事大主義(사대주의)慕華(모화)主義(주의)()事大(사대)慕華(모화)라고도 한다.

意見(의견)[編輯]

擁護論(옹호론)[編輯]

事實(사실)用語(용어)西歐(서구)植民主義(식민주의) 프레임에 ()아시아 外交(외교)關係(관계)를 꿰어 맞추면서 "한 國家(국가)自律性(자율성)抛棄(포기)하고 ()國家(국가)服從(복종)하거나 盲目的(맹목적)으로 追從(추종)하려는 思想(사상) 또는 外交(외교)方針(방침)"을 槪念化(개념화)하기 위하여 創案(창안)되었다.

國際(국제) 關係(관계)에서는 언제나 相對的(상대적)으로 ()한 나라가 ()한 나라의 눈치를 봐왔다. 이건 靑銅器(청동기) 時代(시대)古代(고대) 國家(국가)登場(등장)以來(이래)現在(현재)까지 東西洋(동서양) 어느 나라를 莫論(막론)하고 共通(공통)으로 있어온 普遍的(보편적)인 일이었다.

中國(중국)秦始皇(진시황) 以來(이래)로 유라시아 大陸(대륙) ()쪽인 ()아시아에서 獨步的(독보적)巨大(거대)權力(권력)이었다. 前近代(전근대) 時期(시기) 中國(중국)()()()이란 名稱(명칭)에 걸맞게 軍事的(군사적), 文化的(문화적), 經濟的(경제적)으로 타 ()아시아 國家(국가)보다 앞서 있었기 때문에, 이들과 交流(교류)를 하면서 文化(문화)를 발전시키는 게 利得(이득)이었지, 쓸데없이 對立(대립)關係(관계)()必要(필요)가 없었다. 다른 ()아시아 國家(국가)歷史上(역사상) 中國(중국) 大陸(대륙)國家(국가)들과 對等(대등)關係(관계)를 맺거나 比等比等(비등비등)하게 影響力(영향력)行使(행사)했던 때는 中國(중국)分裂(분열)()를 맞았을 때를 除外(제외)하고는 없었다. 韓國(한국)()例示(예시)로 들 때, 中國(중국) 大陸(대륙)國家(국가)韓半島(한반도)征服(정복)할 만한 軍事力(군사력)을 가진 境遇(경우)()나라와 ()나라, ()나라를 除外(제외)하고는 거의 없었지만, 當時(당시) ()아시아에서 中國(중국) 大陸(대륙) 國家(국가)와의 交流(교류)傳統的(전통적)으로 事大(사대)形式(형식)으로만 可能(가능)했으며, 形式的(형식적)으로 臣下(신하)自處(자처)했을 때만 可能(가능)한 것이지 同等(동등)關係(관계)에서의 外交(외교)는 거의 不可能(불가능)했다.

이러한 意味(의미)에서 "事大(사대)"는 外交(외교)의 한 形態(형태)活用(활용)되었다. 한족과 맞짱떴던 無數(무수)異民族(이민족) 國家(국가)들이 一時的(일시적)으로 中國(중국)征服(정복)했다가도 오히려 大部分(대부분) 한족에게 同化(동화)되어 밀려났지만, 韓半島(한반도) 國家(국가)들은 맞짱떠서 中國(중국)征服(정복)歷史(역사)는 없더라도 "事大(사대)"의 形式(형식)으로 固有(고유)文化(문화)正體性(정체성)維持(유지)하면서 現在(현재)까지 命脈(명맥)을 이어올 수 있었다.

아울러 文化(문화), 制度的(제도적)側面(측면)에서도 近代(근대) 以前(이전)까지만 해도 中國(중국)當時(당시) ()아시아 文明(문명)中心地(중심지)였기 때문에 저 큰 ()님이 實際(실제)學識(학식)도 높고, ()物件(물건)도 많고, 저렇게 適當(적당)脾胃(비위) 맞춰주면 그럭저럭 너그럽게 베풀기도 하는 便()이니 이걸 利用(이용)한 것이라 보면 된다. 中國(중국)은 이미 ()나라 때부터 장건과 半草(반초)開拓(개척)緋緞(비단)길로 中央(중앙)아시아를 비롯한 西洋(서양)()交易(교역)을 했으며, ()나라에 이르러서는 首都(수도) 長安(장안)國際都市(국제도시)()性格(성격)을 가지게 될 程度(정도)로 다양한 文明(문명)直接的(직접적)으로 만나는 國家(국가)였다. 게다가 中國(중국)名目(명목)() 事大(사대)()朝貢(조공)要求(요구)하기는 했으나, 天子(천자)體面(체면)이라는 名目(명목)()朝貢(조공)() 以上(이상)物件(물건)을 하사했고, 이는 朝鮮(조선)에 있어서는 利得(이득)보는 장사였다. 오죽하면, 朝鮮(조선)使臣(사신)()나라를 訪問(방문)하자 '朝鮮(조선)使臣(사신)은 너무 자주 오는 것 아니냐?'며 使節團(사절단) 交流(교류)를 좀 줄이자고 付託(부탁)하던 境遇(경우)도 있었다. 勿論(물론) ()을 베푼다는 儒敎(유교) 思想(사상)影響力(영향력)에서 相對的(상대적)으로 더 자유로웠던 나라들은 一般的(일반적)으로 朝貢(조공)에서 損害(손해)를 보지 않고 利益(이익)을 보았다. 事情(사정)이 이렇다보니 現實的(현실적)立場(입장)에서 ()하게 지내는 것이 當然(당연)하다.

當時(당시) 中國(중국)()아시아의 秩序(질서)에서 마치 現在(현재)美國(미국)과 같은 位相(위상)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면 된다. 옛날같은 時代(시대) 狀況(상황)에서 별다른 意味(의미)도 없이 中國(중국)敵對(적대)關係(관계)持續(지속)해 왔다면 先進(선진)文物(문물)導入(도입)할 수 있는 經路(경로)가 막히고 國家(국가) 發展(발전)이 사그라들어 結局(결국)滿洲(만주)처럼 中國(중국)一介(일개) 地方(지방)으로 轉落(전락)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推測(추측)도 있다. 事大(사대)라는건 그냥 形式的(형식적)이고 名分(명분)()인 치레였을 뿐이다. 眞心(진심)으로 따르는 것이라고 보기 힘든 것은 羅唐戰爭(나당전쟁)()로 알 수 있다. 羅唐戰爭(나당전쟁)新羅(신라)()나라 領域(영역)을 먼저 攻擊(공격)하면서 始作(시작)되었다.

地政學的(지정학적)으로도 日本(일본)처럼 孤立(고립)된 섬나라라면 상관없겠지만, 韓半島(한반도)境遇(경우) 몽골高原(고원) 等地(등지)에서 꼬리를 물고 發興(발흥)해온 世界(세계) 最强(최강)戰鬪(전투) 民族(민족)들과 直接的(직접적)戰爭(전쟁)을 반드시 ()해야 했다. 이들 北方(북방) 遊牧民族(유목민족)의 힘은 中國(중국) 程度(정도) 되니까 그나마 버틸 수 있었던 것이고 그 마저도 몽골이나 滿洲(만주)(여진)()에게는 本土(본토)가 털렸었다. 이런 獨步的(독보적)强大國(강대국) 中國(중국)이나, ()은 이런 强大國(강대국) 中國(중국)조차도 떡失神(실신)시키던 몽골()이나 滿洲族(만주족)과 같은 戰鬪(전투)民族(민족)들이 韓半島(한반도)侵攻(침공)해온다는 것은 韓民族(한민족) 國家(국가)滅亡(멸망)이나 다름없어 事大(사대)必須的(필수적)戰略(전략)이었다. 實際(실제)로도 世界史(세계사)를 보면 어떤 地域(지역)强大國(강대국)을 박살낸 遊牧民族(유목민족)周邊(주변) 地域(지역)들도 죄다 焦土化(초토화)를 시켜버리는 境遇(경우)가 많았다. 中國(중국)을 깨부술 수 있는 能力(능력)을 지녔음을 立證(입증)()나라나 ()나라만 봐도 리즈 時節(시절) 때에 軍事的(군사적)으로 ()하지는 않았다. 또한 戰力(전력)으로 보면 騎兵(기병)當時(당시) 戰車(전차), 裝甲車(장갑차), 험비나 마찬가지라 그런 걸 수만 () ()數十萬(수십만) ()까지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는 遊牧民族(유목민족)들과 그런 遊牧民族(유목민족)들을 買收(매수)하여 離間(이간)질, 분열시키거나 古典(고전)시킬 수 있는 農耕(농경) 大帝國(대제국)들은 ()코 만만한 相對(상대)가 아니었다. 歷史(역사)에서 로마 帝國(제국)事例(사례)만 봐도 로마 같은 優秀(우수)文物(문물), 巨大(거대)規模(규모)를 가진 農耕(농경) 帝國(제국)조차 正常的(정상적)으로 어느 程度(정도) 돌아가는 農耕(농경) 帝國(제국)을 무너뜨리기가 쉽지 않음을 보여준다. 世界史的(세계사적)으로도 周邊(주변)帝國(제국)들에게 形式(형식)() 事大(사대)를 하는 民族(민족)들이나 나라는 많았다.

오히려 韓半島(한반도)로서는 차라리 어느 程度(정도) 價値觀(가치관)共有(공유)할 수 있는 農耕(농경) 文化圈(문화권)中國(중국)連帶(연대)하는 것이 餘震(여진)이나 몽골 같은 遊牧(유목)+牧畜(목축) 民族(민족)들의 掠奪(약탈)戰爭(전쟁)對處(대처)하는 데 훨씬 나은 選擇(선택)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中世(중세) 後半(후반) 以後(이후)로 갑툭튀하여 ()아시아 () 海岸(해안)을 휩쓸었던 倭寇(왜구)()한 대처도 그렇고. 現實的(현실적)으로 거란이나 몽골의 侵略(침략)에서 ()나라가 高麗(고려)를 도와준 일은 없었지만, ()나라 같은 境遇(경우) 이만주 項目(항목)에서 보듯 女眞族(여진족)共同(공동)으로 對處(대처)境遇(경우)도 있었고 朝鮮(조선)倭寇(왜구)討伐(토벌)했다는 名目(명목)으로 使臣(사신)派遣(파견)하고 ()나라에서 이를 致賀(치하)해 하사한 境遇(경우)도 있었다.

바다 위에서 大陸(대륙)과 떨어졌다는 地理(지리) 條件(조건) 德澤(덕택)强大國(강대국)侵略(침략)에서 자유로웠던 섬나라 日本(일본)은 이러한 歷史(역사)를 비틀어 만든 事大主義(사대주의)라는 槪念(개념)으로 韓國(한국)歷史(역사)貶下(폄하)했다. 日帝(일제)强占期(강점기) 日本(일본)造船(조선)社學(사학)()들은 中國(중국)朝鮮(조선) 사이의 不均衡(불균형)力學(역학)關係(관계)朝鮮(조선) ()後期(후기) 朝鮮(조선)이 보였던 찌질한 모습들을 들추어 이를 韓國(한국)() 全般(전반)特徵(특징)으로 聯關(연관)시켰고, 이를 朝鮮(조선)總督府(총독부) 官吏(관리)들에게 朝鮮(조선)統治(통치)指針書(지침서)提供(제공)하기도 하였다. 近代(근대) 韓國(한국)民俗學(민속학)相當(상당)學術(학술) 成果(성과)를 쌓은 것으로 評價(평가)받는 代表(대표) 植民史(식민사)學者(학자)() 다카하시 盜壘(도루)는 3.1 運動(운동)마저도 中國(중국) 事大主義(사대주의)에서 美國(미국) 事大主義(사대주의)轉換(전환)한 것이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그들이 朝鮮(조선)蔑視(멸시)前提(전제)로 삼은 日本(일본)의 자주 獨立(독립)實際(실제)로는 地政學(지정학) 與件(여건)優位(우위)에 말미암은 것임을 考慮(고려)하지 않았다. 韓國(한국)獨立運動(독립운동) 陣營(진영)舊韓末(구한말)에 더 以上(이상) 中國(중국)最高(최고)가 아님을 깨닫고, 내셔널리즘의 成長(성장)과 함께 日帝(일제)干涉(간섭)植民(식민)統治(통치)에 맞서 自主性(자주성)强調(강조)하다보니 自主性(자주성)과 맞지 않던 過去(과거) 韓半島(한반도) 國家(국가)事大(사대)外勢(외세) 依存(의존)으로 貶下(폄하)하고 非難(비난)했다.

事大主義(사대주의)에서 價値(가치)()盜賊(도적)搜査(수사)除外(제외)하고 추려 보면, ()()國家(국가)同盟(동맹) 關係(관계)維持(유지)하고, 앞선 文物(문물)을 받아들이려는 努力(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事大主義(사대주의)는 예나 只今(지금)이나 世界(세계) 各國(각국)國力(국력)懸隔(현격)差異(차이)가 있고, 超强大國(초강대국)世界(세계) 秩序(질서)를 다스리는 國際(국제) 現實(현실)에서 모든 國家(국가)生存(생존)發展(발전)을 위해서라면 利用(이용)해야 할 戰略(전략)인 셈이다.

또한 朝鮮(조선)()들이 ()나라를 따르고 讚揚(찬양)한 것은 그저 그 나라를 讚揚(찬양)한 게 아니라, 當代(당대) 中國(중국)文明(문명)이 이미 朝鮮(조선)을 앞서갔기 때문이다. 中國(중국)先進(선진) 文物(문물) ()을 다시 朝鮮(조선)中國(중국)을 통해 받아들일 수 있었고, 그렇게 하는 것이 朝鮮(조선)利得(이득)이 되었기 때문이다. 世宗大王(세종대왕) 때 만든 七政算(칠정산)() 中國(중국)授時曆(수시력)中國(중국)을 통해 들어온 아랍의 回回曆(회회력)을 바탕으로 만든 것이며, 訓民正音(훈민정음) 또한 中國(중국)言語學(언어학) 書籍(서적)音韻(음운) 關聯(관련) 書籍(서적)硏究(연구)하여 創製(창제)된 것이다.

()中華(중화)主義(주의)()中華(중화) 文物(문물)이 낡은 것으로 여겨지는 現代(현대)에는 一見(일견) 답답해 보일 수 있겠지만, 事實(사실) 現代(현대) 韓國人(한국인)들도 그 때 當時(당시)와 같은 狀況(상황)이라면 當代(당대) 朝鮮(조선)()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萬若(만약) 3() 世界大戰(세계대전)勃發(발발)하여 中國(중국)과 러시아가 美國(미국), 日本(일본)西歐圈(서구권)을 무너뜨리고 地球(지구)()에 오직 韓國(한국)만이 唯一(유일)民主(민주) 國家(국가)로 남았다고 假定(가정)해 보자. 살아남은 韓國人(한국인)들이 獨裁(독재) 國家(국가)中國(중국), 러시아와 다르게 自身(자신)들은 西歐式(서구식) 民主主義(민주주의)繼承(계승)唯一(유일)國家(국가)라며 自負心(자부심)을 보이는 게 異常(이상)할까? 이와 비슷하게, 西洋(서양)에서도 로마 帝國(제국)文物(문물)을 받아들인 유럽 民族(민족)들이 로마 滅亡(멸망) ()에는 너도 나도 로마의 後繼(후계)()自處(자처)했다.

또한 事大主義(사대주의)關聯(관련)으로 朝鮮(조선)非難(비난)하는 이들이 看過(간과)하는것이 後期(후기) 朝鮮(조선)()나라를 마냥 稱頌(칭송)한것만은 絶對(절대) 아니라는것이다. 代表的(대표적)으로 ()나라의 萬曆帝(만력제)()朝鮮(조선)萬東廟(만동묘)를 지으며 祭祀(제사) 지내준것과는 別個(별개)朝鮮(조선) 亦是(역시) 萬曆帝(만력제)暗君(암군)인건 認知(인지)하고 이()()해서는 매우 否定的(부정적)이었는데 當場(당장) 朝鮮王朝實錄(조선왕조실록)에서는 천계제는 怨望(원망)할 수 없으나 萬曆帝(만력제)政事(정사)를 돌보지 않은점은 絶對(절대)로 본받지 말아야한다고 警告(경고)하는 記錄(기록)이 있다.("사리에 어두운 賃金(임금)怨望(원망)하지 않는 ()이니, 天啓(천계)皇帝(황제)怨望(원망)할 수 없는 賃金(임금)該當(해당)됩니다. 그러나 萬曆(만력)皇帝(황제)初年(초년)靈媒(영매)하고 호걸스럽던 임금이었는데도 四十(사십) () 동안 王位(왕위)에 있으면서 臣僚(신료)들을 ()()한 적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境界(경계)로 삼아야 할 일입니다.")

또한 朝鮮(조선) 朝廷(조정)에서는 ()나라가 ()했다는 消息(소식)을 듣고 나라가 ()했음에도 自決(자결)忠臣(충신)이 없는것에 ()皇帝(황제)가 임금답지 못해 志操(지조)節槪(절개)있는자들이 떠나가서 그렇다고 ()나라를 디스하는 記錄(기록)存在(존재)한다.

批判論(비판론)[編輯]

事大主義(사대주의)時代(시대)變化(변화)에도 不拘(불구)하고 그 흐름을 타지 못하는 데 寄與(기여)했다.

()()交替期(교체기) 以後(이후)에는 ()나라를 正統(정통)으로 認定(인정)하지 않으면서 朝鮮(조선)이 곧 ()나라의 精神(정신)繼承(계승)했다는 精神(정신)勝利(승리)法的(법적)()中華思想(중화사상)擡頭(대두)되었다. 事大主義(사대주의)는 큰 나라를 盲目的(맹목적)으로 따르는 것이지만, ()나라가 오랑캐(()나라)에게 滅亡(멸망)하면서 朝鮮(조선)이 섬겨야 할 '큰 나라'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 ()中華思想(중화사상)情緖(정서)()()交替(교체) 以後(이후) 韓國(한국), 日本(일본), 베트남에서 共通的(공통적)으로 나타난다. 朝鮮(조선)()中華(중화)라는 槪念(개념)王朝(왕조)滅亡(멸망)했지만 中華(중화) 文化(문화)如前(여전)中國(중국) 땅에 存在(존재)하고 있고, 精神的(정신적)으로는 오랑캐의 나라인 ()보다 大國(대국)이니 中和(중화)如前(여전)히 섬기는 우리가 바로 事實(사실)상의 작은 中華(중화)라는 槪念(개념)이기 때문이다. ()中華(중화)主義(주의)自國(자국)優越主義(우월주의)() 面貌(면모)를 보이면서도 基本的(기본적)으로는 中國(중국)()事大主義(사대주의)에서 派生(파생)된 것이다.

() '小人輩(소인배) 나라, 오랑캐 나라, 精神的(정신적)으로 작은 나라인 ()精神的(정신적)으로 偉大(위대)對人(대인)배의 나라 ()中華(중화) 朝鮮(조선)事大(사대)하는 것이 儒敎(유교)原理(원리)에 따르면 옳은 것이지만 ()나라 오랑캐들은 無識(무식)하면서 힘만 센 野蠻人(야만인)들이므로 一旦(일단) 겉으로만 ()을 섬기는 척한다'라는 意味(의미)가 된다. 當時(당시)思想(사상)으로 보면, ()나라는 겉보기에 크기만 클 뿐 ()大國(대국)이 아니었고 수많은 오랑캐 ()것들 () 하나일 뿐이었다. 當然(당연)現實的(현실적)으로는 朝鮮(조선)의 20()가 넘는 人口(인구)를 갖고 있고 壓倒的(압도적)으로 莫强(막강)國力(국력)을 자랑하더라도, 現實(현실)否定(부정)하고자 하는 儒學者(유학자)들의 觀念(관념) ()에서는 '작은 나라'인 ()事大(사대)對象(대상)일 수는 없는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 建國(건국) 以後(이후)에도 朝鮮(조선)은 '事大主義(사대주의)論理(논리)'를 ()코 버리지 않았다. 다만 스스로를 師大(사대)를 하는 나라에서 받는 나라로 規定(규정)했을 뿐이다. 實際(실제)로 그 사대라는 것을 받아본 적은 없고 오히려 거짓으로라도 오랑캐 나라에 事大(사대)하는 우스운 地境(지경)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이와 같이 韓半島(한반도)境遇(경우) 歷史的(역사적)으로 丙子胡亂(병자호란) 以後(이후) 朝鮮(조선) 後期(후기)까지 事大主義(사대주의)()中華(중화)主義(주의)變化(변화)하면서 ()나라와의 交易(교역), 交流(교류)妨害(방해)하였다.

朝鮮(조선)事大主義(사대주의)()中華(중화)主義(주의)變質(변질)된 것은 朝鮮(조선)滅亡(멸망)加速(가속)시켰다고 볼 수도 있는데 그나마 ()나라나 ()나라를 통해 어느 程度(정도)外部(외부)文物(문물)을 받아들이고 있던 以前(이전)에 비해 後期(후기)에 들어서는 中國(중국)除外(제외)外部(외부)와의 交流(교류)가 거의 斷絶(단절)되었고, ()나라를 ()制限的(제한적)文物(문물)만 받아들이다가 나중에 ()나라가 建國(건국)되면서는 ()()나라 그 時節(시절)基準(기준)固定(고정)돼버려서, 청을 ()發展(발전)된 신문물을 받아들이자는 史上(사상)(北學派(북학파))이 賣國奴(매국노) 取扱(취급)을 받아야 했다. 朝鮮(조선)爲政者(위정자)들은 뒤떨어진 朝鮮(조선)을 발전시킬 方案(방안)은 내놓지 않으면서 하는 짓이라는 것은 죽은 ()나라 皇帝(황제)祭祀(제사)를 지내는 것 뿐이었고, 이것은 1937()(年度(연도)錯誤(착오)가 아니다!) 까지도 이어지고 있었다.

念頭(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여기서 말하는 ()나라 皇帝(황제)萬曆帝(만력제)로, 事大主義(사대주의)立脚(입각)祭祀(제사)를 지낸 것이 아니다. 1930年代(연대)가 어떤 時代(시대)인가. 日帝(일제)植民地(식민지) 政策(정책)日帝(일제) 自體(자체)中日戰爭(중일전쟁)世界大戰(세계대전)火魔(화마)로 뛰어들며 露骨的(노골적)인 파시즘의 影響(영향)을 받은 民族(민족)抹殺(말살)政策(정책)이란 至極(지극)暴壓的(폭압적)方向(방향)으로 더 惡化(악화)되고, 그나마 남아있던 獨立運動(독립운동)()들은 ()中華民國(중화민국)에서 장제스의 國府軍(국부군) 支援(지원)아래 싸우고 있던 時節(시절)이다. 이 時節(시절)萬東廟(만동묘)에서 祭祀(제사)를 지낸다는 건 單純(단순)傳統(전통)發露(발로)일 뿐만 아니라 至極(지극)微妙(미묘)하고도 尖銳(첨예)政治的(정치적) 메세지가 담긴 行爲(행위)解釋(해석)하는게 더 자연스럽다.

작은 것이 큰 것을 섬긴다는 '事大(사대)'라는 槪念(개념)一旦(일단) 儒敎(유교)基本(기본) 觀念(관념) () 하나였다는 ()理解(이해)必要(필요)가 있다. '子息(자식)父母(부모)를 섬기고, 弟子(제자)는 스승을 섬기고, 臣下(신하)는 임금을 섬기고, 지어미는 지아비를 섬기고, 나이 어린 사람은 나이 많은 사람을 섬기고, 작은 나라는 큰 나라를 섬겨야 한다'는 생각은 朝鮮(조선)時代(시대) 儒敎的(유교적) 觀點(관점)에서 보면 너무도 當然(당연)한 것이었다. 따지고 보면 ()()라는 것도 작은 것(臣下(신하), 子息(자식))() 큰 것(왕, 父母(부모))을 섬긴다는 事大(사대)論理(논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때문에 '큰 나라에 事大(사대)를 하지 않는 것'은 不孝(불효), 不忠(불충)과 다름 없게 되는 것이다.

事例(사례)[編輯]

高句麗(고구려)[編輯]

高句麗(고구려)-() 戰爭(전쟁)을 이끈 ()()()()文帝(문제)에게 自身(자신)을 '搖動(요동)이라는 똥땅에 있는 臣下(신하) 아무개(遼東(요동)糞土(분토)()(): 搖動(요동)墳土(분토)()())'라 하며 先制(선제) 侵攻(침공)한 것을 謝過(사과)하자 ()文帝(문제)憤怒(분노)를 풀고 爵位(작위)回復(회복)하여 주었으며 마찬가지로 麗水(여수)戰爭(전쟁)에서 活躍(활약)한 영류왕은 戰爭(전쟁)勝利(승리)했음에도 高句麗(고구려) 領土(영토) 한복판에서 벌어진 亂離(난리)통에 ()厭症(염증)을 느꼈는지 被害(피해) 回復(회복) 期間(기간)을 갖기 위해 당태종에게 和親(화친) 政策(정책)을 펼쳤다.

百濟(백제)[編輯]

高句麗(고구려)()首都(수도) 慰禮城(위례성)守勢(수세)에 몰렸을 때 蓋鹵王(개로왕)北魏(북위)援助(원조)要請(요청)하는 國書(국서)를 보냈는데 그 內容(내용)相當(상당)屈辱的(굴욕적)인데 백제의 公主(공주)後宮(후궁)淸掃夫(청소부)로, 子弟(자제)들을 ()()()지기로 보내겠다는 內容(내용)이다.

백제 國王(국왕)代代(대대)南朝(남조)朝貢(조공)을 바치고 冊封(책봉)을 받았다. 一例(일례)武寧王(무령왕)永同(영동)大將軍(대장군)이라는 稱號(칭호)를 받았는데 中國(중국)에서 받은 이 稱號(칭호)武寧王陵(무령왕릉) 誌石(지석)에도 表記(표기)程度(정도)로 매우 자랑스러워 한 것으로 보인다.

新羅(신라)[編輯]

統一(통일) 以前(이전) 新羅(신라)官服(관복)樣式(양식)을 바꾸어 ()과 같이 하였으며, 그() ()해왔던 新羅(신라) 固有(고유)年號(연호)廢止(폐지)하고 ()年號(연호)使用(사용)하도록 했다. 이는 新羅(신라)()나라 中心(중심)天下(천하) 秩序(질서)歸屬(귀속)하겠다는 것을 公式的(공식적)으로 表明(표명)한 것이었다.

羅唐戰爭(나당전쟁)事大主義(사대주의)란 것의 矛盾(모순)이 가장 크게 드러난 事件(사건) () 하나다. 新羅(신라)搖動(요동)熊津都督府(웅진도독부)()나라 領域(영역)을 먼저 攻擊(공격)하면서 7年間(연간)戰爭(전쟁)始作(시작)되었는데, 정작 戰爭(전쟁)터에서는 싸우는 渦中(와중)中國(중국)에는 謝罪(사죄)()를 보내는 () 形式(형식)()事大(사대)繼續(계속)되었다. () '攻擊(공격)해서 罪悚(죄송)했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정작 하던 攻擊(공격)은 멈추지 않고 繼續(계속)하고 있는 셈. 이런 謝罪(사죄)()()나라가 誤判(오판)하게 하는 時間(시간)벌기용이자 ()나라가 戰爭(전쟁)을 그만두도록 名分(명분)을 쌓아주는 것이었고 結局(결국)次例(차례) 決定的(결정적) 攻擊(공격)新羅(신라)가 막아낸 以後(이후)戰爭(전쟁)이 끝나고 머지않아 國交(국교)再開(재개)되었다.

渤海(발해)[編輯]

()나라와 朝貢(조공)-冊封(책봉) 關係(관계)樹立(수립)했으며 ()長安城(장안성)을 본따 首都(수도) 上京(상경)용천부를 區劃(구획)했고 中央(중앙) 組織(조직) 亦是(역시) ()나라()으로 整備(정비)했다.

高麗(고려)[編輯]

()’은 臨時(임시)라는 뜻이고 ‘()’는 맡는다는 뜻이므로, 權知國事(권지국사)는 "아직 冊封(책봉)을 받지 못한 期間(기간) 동안에 臨時(임시)로 나랏일을 맡아 다스린다"라는 뜻을 가진 稱號(칭호)로서, 權署國事(권서국사)라고도 한다. 高麗(고려)太祖(태조) 王建(왕건)王朝(왕조) 創建(창건) 以後(이후) ()卽位(즉위)하면 中國(중국)에 이를 알리어 承認(승인)을 받아야만 ()이라고 ()할 수 있었다. 高麗(고려) 太祖(태조) 王建(왕건)()()高麗(고려)國王(국왕)()라는 稱號(칭호)記錄(기록)() 最初(최초)使用(사용)하였고 以後(이후) 이러한 傳統(전통)後代(후대)高麗(고려)()들에게까지 一種(일종)慣例(관례)로서 繼續(계속) 이어지게 되었다.

光宗(광종)年號(연호)光德(광덕), ()()으로 삼고 稱帝(칭제)建元(건원) 하였지만 ()나라와 거란이 激烈(격렬)하게 抗議(항의)하자 結局(결국) 뜻을 거둔 채 稱帝(칭제)建元(건원)取消(취소)하였고 ()나라를 ()자국으로 認定(인정)하고 ()年號(연호)乾德(건덕)使用(사용)하였다. 成宗(성종)은 994() 6(), ()나라에 '高麗(고려)眞心(진심)으로는 송을 따르고 있으며 거란을 憎惡(증오)한다'는 國書(국서)를 보냈다. 單純(단순)外交的(외교적) ()不利(불리) 때문뿐만 아니라 成宗(성종)()빠로서 儒敎(유교)思想(사상)을 따르고 中國(중국)制度(제도)를 들여오길 좋아했다. 穆宗(목종)이 997()吏部侍郞(이부시랑) 主人(주인)()()派遣(파견)하여 高麗(고려)中和(중화)思慕(사모)하고 있으나 오랑캐 거란에 막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는 國書(국서)를 보냈다. 穆宗(목종)西京(서경)의 이름을 鎬京(호경)으로 바꾸었다. ()()나라의 首都(수도)였다. 以後(이후)好景(호경)은 다시 西京(서경)으로 이름이 돌아오나 光宗(광종)이 바꿨던 이름인 西都(서도)와 같이 西京(서경)別稱(별칭)으로 쓰이게 되었다. 人種(인종) 時期(시기)大花宮(대화궁) 稚魚(치어)에서도 서경이 '鎬京(호경)'으로 나오고 毅宗(의종)人種(인종)에게 만들어 올린 玉冊(옥책)에도 妙淸(묘청)()이 '鎬京(호경)()()'이라 나온다.

1125() 금태종은 高麗(고려)에서 온 國書(국서)接受(접수)하기를 拒否(거부)했는데, 그 理由(이유)國書(국서)棲息(서식)()가 아니고 또 高麗(고려)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라는 考慮(고려)()()나라를 섬겼던 것처럼 ()나라를 섬기라고 해 稱臣(칭신)事大(사대)關係(관계)要求(요구)했는데, 이것을 旣定事實化(기정사실화)하려는 것이었다. 高麗(고려)는 이에 ()해 한동안 아무런 措置(조치)()하지 못하고 있다가 이듬해 1126() 朝廷(조정) 會議(회의)에서 ()나라와의 關係(관계) 設定(설정) 問題(문제)協議(협의)했다. 大多數(대다수)女眞族(여진족)이 오랑캐이므로 相對(상대)할 수 없다고 했으나 實權者(실권자) 李資謙(이자겸)과 여진 征伐(정벌)參與(참여)했던 拓俊京(척준경) ()이 "()나라가 예전에는 작은 나라로써 高麗(고려)()나라를 섬겼으나 只今(지금)强大(강대)해져 ()나라와 北宋(북송)을 멸망시켜 政治的(정치적), 軍事的(군사적) 强國(강국)이 되었고, 우리와 接境(접경)諸般(제반) 情勢(정세)私貸(사대)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또한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은 先王(선왕)()도이니 마땅히 먼저 使臣(사신)을 보내 ()를 지키는 것이 좋다"고 했고 人種(인종)은 이 主張(주장)採擇(채택)했다. 이어 4() 人種(인종)鄭應文(정응문) ()()나라에 보내 自身(자신)()이라 해 事大(사대)()國交(국교)를 맺게 되었다.

武臣(무신)政權(정권) 期間(기간) () 임연이 쿠데타를 일으켜 김준을 죽이자 事大主義的(사대주의적)이었던 元宗(원종)前任(전임) 執權者(집권자)인 김준 때부터 武臣(무신)들에게 人氣(인기)가 좋았던 안경공 ()에게 선양을 하였다. 그리고 몽골帝國(제국)에는 原從(원종)() 때문에 讓位(양위)했다 하였다. 하지만 몽골에 있던 世子(세자)가 쿠빌라이 칸에게 알리자 몽골에 事大(사대)()이었던 原種(원종)支持(지지)하던 몽골이 反撥(반발)하였고 世子(세자)가 몽골()까지 끌고 歸國(귀국)하자 林衍(임연)結局(결국) 힘에 屈服(굴복)하여 다시 元宗(원종)王位(왕위)에 복귀시켰다. 그리고 復位(복위)된 원종대에 開京(개경)으로 還都(환도)하게 된다.

朝鮮(조선)[編輯]

李成桂(이성계)高麗(고려) 王位(왕위)簒奪(찬탈)하고 나라를 세우자 ()나라는 李成桂(이성계)를 권지고려국사라며 ()으로 認定(인정)하지 않는다. 開國(개국)勢力(세력)()나라 皇帝(황제)에게 ()으로 任命(임명)되기 위해 努力(노력)하며 箕子朝鮮(기자조선)을 잇는다는 意味(의미)朝鮮(조선)이란 國名(국명)提示(제시)하여 允許(윤허)받고 朝鮮(조선)을 세우며 以後(이후) ()나라에 事大(사대)한다.

淸州(청주) ()(), 利川(이천) ()(), 太原(태원) 鮮于(선우)(), 행주 ()()記者(기자)箕子朝鮮(기자조선)()들이 祖上(조상)이라며 자랑스러워 했다.

太宗(태종)諸侯國(제후국)制度(제도)自體的(자체적)諸侯(제후)冊封(책봉)하는것은 禮法(예법)() 맞지 않다고 한 以後(이후) 朝鮮(조선)은 '皇帝(황제)'에게 冊封(책봉) 받은 ()()朝鮮(조선)() 王爵(왕작)하나만을 除外(제외)하고 中國(중국) 君主(군주)가 아닌 韓國(한국) 君主(군주)自體的(자체적)으로 임명하는 一切(일체)王爵(왕작)五等爵(오등작) 爵位(작위)를 없애 버린다.

太宗(태종)은 "조금이라도 事大(사대)()를 잃어서는 안되며, 마땅히 ()보다 높여 至誠(지성)으로 天子(천자)使臣(사신)을 섬겨야 한다."는 遺訓(유훈)을 내리며 '恩惠(은혜)를 맞이 한다'는 意味(의미)迎恩門(영은문)을 세웠다. 또한 바로 옆에는 '中和(중화)欽慕(흠모)한다'는 意味(의미)使臣(사신) 迎賓館(영빈관)이었던 慕華館(모화관)도 있었다. 이 둘은 中國(중국)에서 皇帝(황제)使臣(사신)이 올 때 거처가는 곳이었으며 皇帝(황제)臣下(신하)였던 諸侯國(제후국) 朝鮮(조선)()은 이곳까지 直接(직접) 마중을 나가서 使臣(사신)을 맞이 했다. 이때 當然(당연)朝鮮(조선)()天子(천자)臣下(신하)로서 中國(중국) 使臣(사신)과 서로 맞절을 해야 했다.

宣祖(선조)光海君(광해군)()나라 皇帝(황제)에게 世子(세자)冊封(책봉)을 받지 않았다는 것을 가지고 光海君(광해군)排斥(배척)하는 名分(명분)으로 使用(사용)했다.

壬辰倭亂(임진왜란)丁酉再亂(정유재란)이라는 亡國(망국)危機(위기)()나라의 萬曆帝(만력제)高麗(고려)天子(천자) 또는 朝鮮(조선)皇帝(황제)라는 비아냥까지 들어가며 22() 大軍(대군)과 쌀 100()섬이라는 國庫金(국고금)에다 內帑金(내탕금)까지 消耗(소모)해서 엄청난 物量(물량)을 쏟아부으며 朝鮮(조선)起死回生(기사회생) 시키며 살려주자 朝鮮(조선)에는 再造之恩(재조지은)이라는 義理(의리)觀念(관념)이 피어난다. 以後(이후) ()나라가 ()해져서 ()나라 路線(노선)外交的(외교적)으로 不利(불리)해져도 盲目的(맹목적)으로 오직 ()나라만 따라야 한다는 主張(주장)得勢(득세)하였고 ()()()하자 恩惠(은혜)를 갚자는 北伐論(북벌론)() 일어난다. 民間(민간)에서는 丙子胡亂(병자호란) 以後(이후) ()나라에 ()()하여 淸國(청국)皇帝(황제)上國(상국)으로 모시지만 眞正(진정)天子(천자)는 오직 ()나라 皇帝(황제)라며 마지막 ()나라 皇帝(황제)였던 崇禎帝(숭정제)年號(연호)使用(사용)하고 碑石(비석)에는 ()明朝(명조)()()이라며 ()나라에 있는 造船(조선)()이라는 文句(문귀)使用(사용)하며 萬曆帝(만력제)追慕(추모)하는 ()()()萬東廟(만동묘)를 세우며 信仰(신앙)에 가까운 ()나라 崇拜(숭배)意識(의식)이 생겨난다.

世界(세계) 最初(최초)兒童用(아동용) 敎科書(교과서)童蒙先習(동몽선습)에는 '中國人(중국인)이 작은 中華(중화)라고 稱讚(칭찬)하니 이 어찌 記者(기자)가 남긴 敎化(교화)가 아니겠는가? 아! 어린이들은 마땅히 이 것을 보고 感動(감동)하여 奮發(분발)해야 한다.'라는 대목이 있다.

開化期(개화기)西洋(서양) 여러나라의 異樣船(이양선)들이 朝鮮(조선)通商(통상)을 하자 ()하면 朝鮮(조선)恒常(항상) 拒否(거부)하였는데 그 理由(이유)朝鮮(조선)()나라의 屬國(속국)이므로 自體的(자체적)外交(외교) 決定權(결정권)權限(권한)이 없어서 ()나라의 許諾(허락)必要(필요)하다는 것이 外交(외교)()公式(공식)答辯(답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