淡海三船은 8世紀 日本의 前 皇族 出身의 貴族이자 文人이다. 壬申의 亂으로 天武天皇에게 敗하고 쫓겨나 自決한 大友皇子의 曾孫이다.
그는 漢風諡號(中國式 諡號)가 日本에 傳해지기 以前의 初代부터 第41代까지의 天皇에게 漢風諡號를 制定하여 追贈하였다.
經歷[編輯]
722年에 태어났다. 皇族으로서의 이름은 御船王이었다. 天平 年間에 唐나라 僧侶 道璿을 따라 出家하여 王號를 버리고 法名으로 元開라 稱하였다.
751年 三十餘 名의 諸王들에게 眞人 姓을 賜姓하며 身分 降格가 이루어졌을 때, 勅命에 따라 還俗하여 御船王의 이름으로 돌아간 뒤, 淡海의 氏와 眞人의 姓을 부여받아 臣籍으로 降下되어 淡海眞人三船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後에 式部少丞, 內豎를 歷任했으나, 756年 朝廷을 誹謗했다는 罪目로 出雲守 大伴古慈斐와 함께 衞士府에 禁錮되었다가 곧 放免되었다.
764年8月에 美作守로 任命되어 다시 地方官으로 轉任되었다. 같은 해 9月에 惠美押勝, 卽 藤原仲麻呂의 亂이 일어났다. 三船은 이때 造池使로서 近江國 勢多에 滯留 中이었으며, 造池使判官 佐伯三野와 함께 兵馬를 調達하기 위해 仲麻呂가 派遣한 使者를 붙잡아 拘束하였다. 以後 그는 勢多橋를 불태워 仲麻呂의 叛亂軍이 東山道로 進軍하는 길을 遮斷했다. 이 功勞로 그는 正五位上에 陞敍하고 勳三等의 敍勳을 받고, 近江介로 任命되었다.
771年 刑部大輔와 京官에 從事하며, 後에 大學頭, 文章博士 等을 歷任하여 780年 從四位下에 敍位되었다.
784年에 刑部卿으로 轉任되었으나, 이듬해 7月17日 卒去하였다. 享年 64歲. 最終 官位는 刑部卿從四位下兼因幡守였다.
人物[編輯]
續日本紀의 卒傳에 따르면, 그는 聰明하고 銳敏한 性品이었고 많은 冊을 讀破하였으며 冊을 著述하는 것을 즐겼다고 評한다. 當時 石上宅嗣와 함께 "文人의 으뜸"(文人の首)으로 불렸다고 石上宅嗣의 卒傳에는 傳하고 있다.
젋었을 때는 僧侶였던 經歷도 있었으며, 新羅의 僧侶 元曉가 지은 金剛三昧經論을 읽고 感歎해 779年에 日本을 訪問한 新羅 使臣團의 判官 薩仲業이 元曉의 孫子라는 事實을 알고 그에게 漢詩를 지어주기도 하는 等, 外典이나 漢詩에도 뛰어났다. 그의 漢詩 5首가 經國集에 실려 있으며, 現存하는 日本 最古의 漢詩集 懷風藻의 撰者로 보는 설도 있다. 또한 日本書紀의 註釋書인 釋日本紀에 引用된 私記에는 神武天皇에서 元正天皇에 이르는 歷代 天皇(弘文天皇과 文武天皇을 除外)의 漢風諡號를 모두 撰進한 事實이 記錄되어 있다. 또한 779年에 唐나라에서 渡來한 僧侶 鑑眞의 傳記인 唐大和上東征傳을 著述하였다. 續日本紀 前半部 編輯도 三船가 關與했다고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