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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비슷하게, 西洋에서도 로마 帝國의 文物을 받아들인 유럽 民族들이 로마 滅亡 後에는 너도 나도 로마의 後繼國을 自處했다. 또한 事大主義關聯으로 朝鮮을 非難하는 이들이 看過하는것이 後期 朝鮮이 明나라를 마냥 稱頌한것만은 絶對 아니라는것이다. 代表的으로 明나라의 萬曆帝에 對해 朝鮮이 萬東廟를 지으며 祭祀 지내준것과는 別個로 朝鮮 亦是 萬曆帝가 暗君인건 認知하고 이點에 對해서는 매우 否定的이었는데 當場 朝鮮王朝實錄에서는 천계제는 怨望할 수 없으나 萬曆帝가 政事를 돌보지 않은점은 絶對로 본받지 말아야한다고 警告하는 記錄이 있다.("사리에 어두운 賃金은 怨望하지 않는 法이니, 天啓皇帝는 怨望할 수 없는 賃金에 該當됩니다. 그러나 萬曆皇帝는 初年에 靈媒하고 호걸스럽던 임금이었는데도 四十 年 동안 王位에 있으면서 臣僚들을 隣接한 적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境界로 삼아야 할 일입니다.") 또한 朝鮮 朝廷에서는 明나라가 亡했다는 消息을 듣고 나라가 亡했음에도 自決한 忠臣이 없는것에 對해 皇帝가 임금답지 못해 志操와 節槪있는자들이 떠나가서 그렇다고 明나라를 디스하는 記錄도 存在한다. === 批判論 === 事大主義는 時代의 變化에도 不拘하고 그 흐름을 타지 못하는 데 寄與했다. 明淸交替期 以後에는 淸나라를 正統으로 認定하지 않으면서 朝鮮이 곧 明나라의 精神을 繼承했다는 精神勝利法的인 小中華思想이 擡頭되었다. 事大主義는 큰 나라를 盲目的으로 따르는 것이지만, 明나라가 오랑캐(淸나라)에게 滅亡하면서 朝鮮이 섬겨야 할 '큰 나라'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 小中華思想의 情緖는 明淸交替 以後 韓國, 日本, 베트남에서 共通的으로 나타난다. 朝鮮의 小中華라는 槪念은 王朝는 滅亡했지만 中華 文化가 如前히 中國 땅에 存在하고 있고, 精神的으로는 오랑캐의 나라인 請보다 大國이니 中和를 如前히 섬기는 우리가 바로 事實상의 작은 中華라는 槪念이기 때문이다. 小中華主義는 自國優越主義的 面貌를 보이면서도 基本的으로는 中國에 對한 事大主義에서 派生된 것이다. 卽 '小人輩 나라, 오랑캐 나라, 精神的으로 작은 나라인 請이 精神的으로 偉大한 對人배의 나라 小中華 朝鮮에 事大하는 것이 儒敎原理에 따르면 옳은 것이지만 淸나라 오랑캐들은 無識하면서 힘만 센 野蠻人들이므로 一旦 겉으로만 請을 섬기는 척한다'라는 意味가 된다. 當時의 思想으로 보면, 淸나라는 겉보기에 크기만 클 뿐 決코 大國이 아니었고 수많은 오랑캐 雜것들 中 하나일 뿐이었다. 當然히 現實的으로는 朝鮮의 20倍가 넘는 人口를 갖고 있고 壓倒的으로 莫强한 國力을 자랑하더라도, 現實을 否定하고자 하는 儒學者들의 觀念 上에서는 '작은 나라'인 請이 事大의 對象일 수는 없는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靑 建國 以後에도 朝鮮은 '事大主義의 論理'를 決코 버리지 않았다. 다만 스스로를 師大를 하는 나라에서 받는 나라로 規定했을 뿐이다. 實際로 그 사대라는 것을 받아본 적은 없고 오히려 거짓으로라도 오랑캐 나라에 事大하는 우스운 地境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이와 같이 韓半島의 境遇 歷史的으로 丙子胡亂 以後 朝鮮 後期까지 事大主義가 小中華主義로 變化하면서 淸나라와의 交易, 交流를 妨害하였다. 朝鮮의 事大主義가 小中華主義로 變質된 것은 朝鮮의 滅亡을 加速시켰다고 볼 수도 있는데 그나마 宋나라나 元나라를 통해 어느 程度는 外部의 文物을 받아들이고 있던 以前에 비해 後期에 들어서는 中國을 除外한 外部와의 交流가 거의 斷絶되었고, 明나라를 通한 制限的인 文物만 받아들이다가 나중에 淸나라가 建國되면서는 亡한 明나라 그 時節에 基準이 固定돼버려서, 청을 通해 發展된 신문물을 받아들이자는 史上(北學派)이 賣國奴 取扱을 받아야 했다. 朝鮮의 爲政者들은 뒤떨어진 朝鮮을 발전시킬 方案은 내놓지 않으면서 하는 짓이라는 것은 죽은 明나라 皇帝의 祭祀를 지내는 것 뿐이었고, 이것은 1937年(年度의 錯誤가 아니다!) 까지도 이어지고 있었다. 念頭에 두어야 할 것은, 여기서 말하는 明나라 皇帝는 萬曆帝로, 事大主義에 立脚해 祭祀를 지낸 것이 아니다. 1930年代가 어떤 時代인가. 日帝의 植民地 政策은 日帝 自體가 中日戰爭과 世界大戰의 火魔로 뛰어들며 露骨的인 파시즘의 影響을 받은 民族抹殺政策이란 至極히 暴壓的인 方向으로 더 惡化되고, 그나마 남아있던 獨立運動家들은 主로 中華民國에서 장제스의 國府軍 支援아래 싸우고 있던 時節이다. 이 時節에 萬東廟에서 祭祀를 지낸다는 건 單純한 傳統의 發露일 뿐만 아니라 至極히 微妙하고도 尖銳한 政治的 메세지가 담긴 行爲로 解釋하는게 더 자연스럽다. 작은 것이 큰 것을 섬긴다는 '事大'라는 槪念은 一旦 儒敎의 基本 觀念 中 하나였다는 點을 理解할 必要가 있다. '子息은 父母를 섬기고, 弟子는 스승을 섬기고, 臣下는 임금을 섬기고, 지어미는 지아비를 섬기고, 나이 어린 사람은 나이 많은 사람을 섬기고, 작은 나라는 큰 나라를 섬겨야 한다'는 생각은 朝鮮時代 儒敎的 觀點에서 보면 너무도 當然한 것이었다. 따지고 보면 忠과 孝라는 것도 작은 것(臣下, 子息)李 큰 것(왕, 父母)을 섬긴다는 事大의 論理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때문에 '큰 나라에 事大를 하지 않는 것'은 不孝, 不忠과 다름 없게 되는 것이다. 要約(요약): 國漢大百科(국한대백과)에서의 모든 寄與(기여)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著作者(저작자)表示(표시)-同一(동일)條件(조건)變更(변경)許諾(허락) 라이선스로 配布(배포)된다는 點(점)을 留意(유의)해 주세요 (仔細(자세)한 內容(내용)에 對(대)해서는 國漢大百科(국한대백과):著作權(저작권) 文書(문서)를 읽어주세요). 萬若(만약) 여기에 同意(동의)하지 않는다면 文書(문서)를 貯藏(저장)하지 말아 주세요. 또한, 直接(직접) 作成(작성)했거나 퍼블릭 도메인과 같은 自由(자유) 文書(문서)에서 가져왔다는 것을 保證(보증)해야 합니다. 著作權(저작권)이 있는 內容(내용)을 許可(허가) 없이 貯藏(저장)하지 마세요! 자동 편집 스팸으로부터 위키를 보호하기 위해, 다음 CAPTCHA를 풀어주세요: 取消(취소) 編輯 도움말 (새 窓(창)에서 열림)